장로사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웩”
달빛을 덮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미적지근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훅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에 코를 움켜쥐었다. 술에 취한 행인이 토를 한 것이다.
“하하하, 할아버지, 속상하겠어요.”
저만치 책방 앞 노란 벤치가 나를 보고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에구, 이제 늙어 쓸모없게 보여서 그렇지 뭐!”
처량한 신세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사실 한 달 전 노란 벤치가 오기 전까지는 간혹 행인들이 찾아와 쉬어가고는 했는데, 이제 그마저도 뜸해졌다.
오늘은 노란 벤치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다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나도 저리 젊은 시절이 있었는데.’
나는 동네 슈퍼 앞 큰 나무 아래 놓인, 오래된 나무 의자다. 다리가 늘 삐거덕거리고, 밤에는 온몸이 쑥쑥 아려 잠도 잘 자지 못한다. 어쩌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찾아와 귀찮게 하는 거 말고는 찾는 이가 없다. 내 몸이 이리되기 전에는 종종 행인들이 찾아와 쉬어가면 반갑고 기뻤는데. 그들은 내게 피곤한 몸을 맡기며 고마워하고 행복해했다. 그땐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우리 좀 쉬어갈까? 내가 슈퍼에서 따뜻한 커피 사 올게!”
가을볕이 따뜻한 어느 날, 미소가 예쁜 두 아가씨가 내 곁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나는 서둘러 아가씨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어머, 저기 좀 봐! 노란 벤치야! 너무 앙증맞고 예쁘다. 우리 저기 앉을까? 편해 보이는데.”
“햇볕도 잘 들어 따뜻할 것 같네.”
‘나도 편안한데….’
그들은 한마디씩 하고 노란 벤치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가버렸다.
‘아, 옆에 나무만 없었어도.’
나는 괜스레 바로 옆에서 햇볕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나무가 원망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동네 공원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내게 와 편안하게 쉬어갔다. 달이 밝은 밤에는 생쥐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걱정 없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란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덩치가 큰 중장비를 끌고 오더니 공원에 있던 커다란 나무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위이윙! 위이윙!”
“쿵!”
“깜짝이야! 이게 무슨 소리야?”
내 옆으로 뒤쪽에 있던 덩치가 큰 나무가 쓰러졌다.
“아이고, 어떡해! 아프겠다.”
나는 잘려진 나무를 위로했다.
“괜찮아? 나무야?“
“아니, 안 괜찮아! 너무 아프고 무서워. 흑흑흑”“너무 놀라고 아프겠다. 조금만 참아. 사실 나도 너 같은 나무였어. 내 몸이 베어질 땐 너무 놀라 아파도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어. 그런데 이렇게 근사한 의자가 되었어. 너도 멋진 무언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야.”
“정말 그럴까? 흐흑!”
“그럼, 희망을 가져.”
나무는 울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갖는 듯했다. 커다란 트럭이 와서 베어진 나무들을 싣고 갔다.
“안녕! 잘 가, 나무야.”
나무가 잘려 나간 곳이 훵해지더니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파란 하늘이 보였다.
“와! 하늘이다.”
즐겁던 마음도 잠시, 아저씨들이 오더니 내 발밑을 파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오더니 말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 의자도 쓸모없겠네요?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그래서 나무를 잘랐구나. 나를 어디로 가지고 간다는 얘기지?’
나는 가슴이 걱정과 두려움에 쿵쿵 뛰었다.
“아니, 다 낡아빠진 의자는 뭐 하시려고요?”
“아직 쓸 만한데요. 우리 가게 앞 나무 아래 놓으려고요. 의자를 놓으면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어 좋을 것 같아서요.”
처음 이곳에 온 얼마 동안은 나를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내게 힘든 몸을 쉬어가며 고마워했다. 하지만 노란 벤치가 온 뒤로 내 처지는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에이고, 내가 못 살아! 강아지가 똥까지 쌌네. 아이고 냄새야!”
가게 아주머니가 아침부터 내 몸에 차가운 물을 퍼부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는 솔로 내 몸을 박박 문질렀다. 찝찝하던 몸이 씻겨나가며 마음이 한결 상쾌해졌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아이고, 갖다 버리든지 해야지, 원! 여기 두니 할 일만 더 생기네. 애물단지네!”
저만치 노란 벤치가 아주머니와 나를 번갈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나를 버리겠다고? 내가 애물단지라고?’
오래간만에 목욕으로 개운했던 마음이 다시 슬퍼져 눈물이 핑 돌았다.
“에구 허리야! 여기서 좀 쉬어야겠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았다. 파지 줍는 동네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노란 벤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내게로 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잖아도 한동안 할아버지가 안 보여 궁금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이곳에 온 후 처음 맞은 손님이었다. 그날도 할아버지는 무거운 파지를 어깨에 메고 지나가다 나를 발견하고 무척 반가워했다. 아직도 할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이 남아있는 듯 헸다. 앙상한 뼈가 내 몸에 닿았을 때의 느낌.
“너도 나만큼 늙었구나. 너는 나 같은 사람을 편히 쉬게 해 줬으니 네 몫은 다한 셈이지.”
할아버지가 나를 거친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내 몫을 다했다고?’
나를 칭찬하는 할아버지가 참 고맙고 좋았다. 그리고 한동안 할아버지는 보이질 않았다. 매일 할아버지를 기다렸지만 소용없었다.
‘어디가 편찮으신가? 할아버지가 왜 안 오시지?’
그런데…
‘아, 할아버지!’
굽은 허리를 하고 내게 몸을 기대앉은 할아버지가 반가워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는 전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내게 기대며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이고 허리야!”
‘할아버지, 왜 그동안 안 오셨어요?’
할아버지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아, 이 포근함!’
나는 온몸으로 할아버지의 체온을 느꼈다.
“할아버지가 오셨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나는 노란 벤치에 큰 소리로 자랑했다.
“널 찾는 이들은 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잖아. 오늘은 늙고 앙상한 할아버지네. 하하, 난 솔솔 향기 나는 예쁜 소녀들과 다정한 연인들만 찾아오는데! 너와는 비교가 안 되지!”
“그래도 괜찮아. 힘들고 고달픈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아 쉬어갈 수 있으면 나는 행복하니까.”
“흥!”
노란 벤치가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쉬리릭. 쉬리릭.”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었다. 행인들이 뚝 끊겼다. 모두가 짧은 해만큼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해질녘 학원을 마치고 돌아가던 남자아이 서너 명이 내게 몰려왔다. 오랜만에 맞는 손님이라 반가웠다. 기뻤던 마음도 잠깐, 갑자기 두 아이가 한 아이를 내게 밀어붙이며 험상궂게 말했다.
“너 오늘도 빈손이야? 재수 없어! 에이 성질나!”
“퍽! 퍽!”
“아아 아악. 하지 마!”
맞은 아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내게 쓰러지다시피 몸을 기댔다.
나는 얼른 아이가 기댈 수 있게 아픈 다리를 쭉 뻗었다.
‘이놈들! 친구를 때리면 못써!’
안타까운 마음에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 녀석들은 갑자기 내 몸에도 발길질했다. 녀석들이 내 왼쪽 성치 않은 다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너무 아파 깜짝 놀랐다.
‘악!’
반쯤 금이 갔던 다리가 뚝 부러졌다. 내게 가까스로 기대던 아이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오늘은 이만 봐 준다. 다음에 또 빈손이면 그때는 이 의자 다리처럼 네 다리도 부러질 줄 알아.”
두 녀석이 아이한테 발길질을 몇 번 더 하더니 씩씩거리며 사라졌다.
‘괜찮아?’
내 아픈 몸보다 쓰러진 아이가 더 걱정되었다. 아이는 겨우 일어서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더니 그 녀석들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노란 벤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노란 벤치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어 코끝이 찡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난 괜찮아. 고마워! 노란 벤치야!”
그날 밤 다른 쪽 다리까지 쑥쑥 쑤셨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큰 나무가 안쓰럽게 나를 내려다보며 위로했다.
“나무 의자야, 괜찮아? 힘들면 내게 기대렴.”
“고마워! 큰 나무야!”
내게 그늘을 만든다고 구박했던 나무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울컥 목이 메었다.
“에구, 힘들다. 좀 쉬어가야겠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파지 줍는 할아버지였다. 다리가 욱신댔지만 있는 힘껏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이고, 이 녀석 다리가 고장 났네!”
막 앉으려던 할아버지가 놀라 일어서며 말했다.
“쯧쯧쯧, 고치면 아직 쓸 만하겠는데. 잠깐만 기다리렴, 내가 고쳐줄게!”
할아버지는 아픈 다리를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툭탁, 툭탁!”
할아버지가 가게에서 연장을 들고나오더니 뚝딱뚝딱 고쳐주셨다. 할아버지의 망치질이 안마하듯 시원하게 느껴졌다.
“다 됐다. 이제 제법 멀쩡하게 되었네.”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할아버지가 고마웠다. 할아버지의 아픈 다리도 내 다리처럼 고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봄 햇살에 졸린 눈을 비비며 눈을 떴다. 향긋하고 가벼운 깃털 같은 게 내 몸에 앉았다. 하늘에서 하얀 꽃비가 내려 온통 내 몸을 덮었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소녀들이 참새 떼처럼 재잘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얘들아, 여기 벤치 좀 봐! 벚꽃이랑 너무 잘 어울려!”
“정말 예쁘다.”
“우리 셀카 찍자!”.
소녀들이 꽃잎처럼 사뿐히 내 등에 기대앉아 사진을 찍으며 깔깔대고 웃었다. 내 마음도 꽃잎처럼 살랑거렸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행인들은 나를 찾아왔다. 성가셨던 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다니! 꽃이 지고 햇볕이 뜨거워지자, 더 많은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여기서 쉬었다 가자. 그늘이 져 시원하겠는걸.”
저만치 노란 벤치가 부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노란 벤치야, 겨울이 오면 따스한 햇살이 드는 네 자리를 사람들이 다시 찾을 거야. 그때까지만 기다리렴.”
내 말에 노란 벤치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리고 그동안 놀려서 죄송해요.”
“괜찮아.”
“어머, 아주머니! 의자에 색 좀 칠하실래요? 빨강이나 초록, 아니면 흰색은 어떠세요? 제가 페인트가 있는데, 나눠 드릴까요?”
노란 벤치 앞 책 방 아가씨가 아주머니께 와서 말했다.
“아이고, 고맙긴 한데 이대로가 좋아요. 낡아 보여도, 나무 그대로의 색이 주는 분위기가 편하고 멋지잖아요?”
“맞아요. 나무색이 의자다운 분위기가 있어 보여 정감이 가긴 해요.”
두 사람의 대화에 마음이 몽글몽글 따뜻해졌다. 저만치 노란 벤치가 내 마음을 안다는 듯 활짝 웃었다. 나도 눈으로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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