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배아이 (사)한국문협 밴쿠버 지부 회원
지난 5월, 빌 게이츠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며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말을 인용하여 그의 재산 중 99%를 기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이미 지난 25년 동안 1천억 달러 넘는 돈을 사회에 환원했는데, 앞으로 20년 동안 1,070억 달러(약 150조 원)로 추정되는 그의 재산 중 1퍼센트만을 남기고 모두 세상에 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어떤 책에서 “부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내 잘못이다.”라는 글귀를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은 적이 있다. 돈에 대한 죄악시 아닌 죄악시 수준으로 나는 어려서부터 부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부모를 잘 만나서 고생도 안 해봤을거라고, 어쩌면 법의 사각지대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한 것이 틀림없다고, 아니면 법을 어겨서, 또는 남을 속여서 부를 쌓았을 거라고 믿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졸부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여겼다. 의심의 여지 없이 당연하게 부정적으로만 판단한 이유는 내 가까운 곳에 부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부자에 대해 부러움이 먼저 있었는데 나는 정말 솔직하지 못했다. 내가 부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거리를 그렇게 찾아서 만들었다.
돈을 어떻게 하면 벌까? 그런 생각은 별로 해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집 한 칸 없었는데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지가 이상하리만큼 약했다. 대신에 ‘돈이 없어도 행복해.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 단편적인 사실을 전체로 일반화했다. 내가 정복하지 못한 분야였다. 아니, 엄두도 내본 적이 없는 세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주 엉뚱한 발상으로 누구나 부자가 될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내가 생각해 낸 부자가 되는 방법을 따라 하면 당신은 전 세계 1% 안에 드는 부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모님의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되’면 된 ‘다’. 지금부터 김이 새서 이 글의 나머지를 안 읽을 분들이 분명 나올 테다. 이것이 상위 1% 안에 들 수 있는 까닭이다. 부모님의 인생을 기록하려는 사람이 그만큼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엄연히 부자 되기 프로젝트는 실행된 바 있다. 이민이라는 먼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친정엄마의 환갑이 있었다. 이민이란 걸 하고 나면 효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형편이 분명했기에 엄마의 환갑을 특별하게 기념할 수 있는 걸 고민하다가 엄마의 일생을 정리하는 소책자를 만들어 드리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던 엄마의 레퍼토리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무용학원 원장님의 딸이었던 나는 걸음마 걸을 때부터 춤추는 걸 배웠다. 하지만 무용학원에 무용 배우러 온 애들보다 열심히 춤을 추지 않았다. 엄마의 문하생들이 열심히 춤을 추게 하려고 나는 종종 본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는데, 장고 북편을 두들기는 궁채로 알밤을 맞을 때가 많았다. 한 대 맞았을 때 별이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눈물을 훔치며 뒤통수를 만져보면 정말 알밤만 한 혹이 만져졌다. 그래서 엄마를 위한 소책자의 제목이 정해졌다. <춤추는 궁구리채>. 궁채가 춤출 정도로 맞아 내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적고, 내 어린 시절 이야기도 적었다.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적었고, 내 학창 시절 이야기도 적었다. 엄마의 형제 이야기도 한 꼭지 들어갔다. 엄마의 아들 이야기도 한 자리 차지했다. 뭐니 뭐니 해도 엄마의 무용 이야기가 들어갈 적엔 흑백 사진도 여러 장 삽입되었다. 엄마는 한국무용은 물론이고, 남방무용도 할 줄 아셨고, 엄지손가락에 캐스터네츠를 끼워 따따딱 연주하며 탭댄스를 추는 정열의 플라멩고도 추는 분이었다. 우리 집의 가장 많은 수입원이 된 종목은 아무래도 사교춤이었다. 서울-대구-부산-찍고 돌아오는 지루박(지터벅)이 초보자들을 위한 과목이었다. 엄마는 키 큰 아주머니들에게 남자 스탭을 배우게 하여 남자 부족을 메꾸었다. 사실상 우리 무용학원에 내 동생 빼고 남자는 없었다. 나는 엄마가 수업할 때 옷 갈아입으라고 쳐 둔 커튼 뒤에서 숙제하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장고를 쳐대고, 음악 소리가 들려도, 어쩔 도리가 없이, 불평 없이 공부해야 했다. 지루박의 뽕끼 넘치는 반주 음악보다는 내가 좋아했던 곡이 화려한 화장과 그전엔 없던 팝페라라는 장르로 파격을 준 키메라의 노래였다. 엄마는 경쾌하고 경이로운 고음으로 과연 인간이 만들어 내는 소리인지 전자음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짜릿한 전율을 양산하는 ‘오페라떼끄(Operatheque C)’에 맞춰 자이브를 췄다. 차차차-차차차-차차차 라겐!!! 사교춤은 한 때 국가의 단속 대상이었고, 스포츠댄스라는 개명을 하고 올림픽 시범 종목이었던 적도 있다.
엄마는 1947년생으로, 세 살 되던 해에 전쟁을 맞았는데, 전쟁 속에서도 피난 다니는 중에도 춤을 배웠다. 왜냐하면 6촌 삼촌이었던 김윤학 할아버지 가족과 같은 동네에 살았고, 할아버지 무용연구소를 들락거렸고, 외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춤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1920년대 최승희 시절에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셨다 한다. 김윤학 할아버지는 그 시절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유명한 남자 무용가셨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무용을 배우러 가는 것을 못마땅해하여, 이불 빨래를 다 해놓으면 나갈 수 있다고 하면 눈 깜짝할 새에 해놓고 나갔단다. 학원에 들어갈 수 없을 때는 열쇠 구멍을 통해 춤 순서를 외웠다고도 했다. 할아버지는 전쟁 사변 가운데 전국을 돌면서 군대 장병들 앞에서 위문 공연을 했다. 엄마도 그 위문 공연에 따라갔고, 하루는 무용수들이 묵은 여인숙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모두 정신을 못 차렸는데, 엄마만이 멀쩡해서 혼자서 공연을 해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부자 되기 프로젝트’는 나중에 반전을 만들고자 내가 마케팅을 한 것이지만, 내 인생에 이민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부모님의 환갑이라고 해서 그토록 기특한 생각을 했을 것 같지 않다. 그 누구라도 영화 같은 인생의 이야기가 없으랴마는 우리 엄마의 고단하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내가 기록해 놓지 않는다면 예술 하는 엄마의 진주 같은 인생이 너무 아깝다. 무용 시간보다는 국어 시간을 좋아했던 내가, 힘든 날이면 일기에 고민과 억울함을 폭풍처럼 쏟아냈던 내가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지 않았나 싶다. 엄마는 딸내미를 보러 한 번의 캐나다 방문을 하셨고, 나는 네 명 아이를 데리고 단 한 번 한국에 갔다. 엄마를 화상전화로만 보고, 손으로는 못 만진 게 어언 십 년이 되어 간다. 십 년 가까이 엄마에게 가고 싶어도 못 간 처지에 형편인 내가 한심하다. 왜 일찍 부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한심하다. 제 새끼 키우기에 버겁다고, 어렵다고만 했던 것이 한심할 뿐이다. 나는 늦었지만 이제서야 부자가 되는 법을 공부하고 있다. 더 늦으면 정말 아주 늦어 질까봐 아슬아슬하지만 부자가 되기로 맘먹었다. 부자는 고사하고, 돈을 버는 사람이 되려고 고군분투한다. 돈을 벌 줄 아는 사람이 되려고 출근하고 있다. 퇴근하면 사람들을 만나서 사업 설명을 한다. 필요하면 제품 하나라도 배달하러 다닌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운전하는 동안에는 성공한 사업가들의 연설을 청취한다. 쉬는 시간에 지인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1분도 짬이 나면 아까워서 운동시간을 모은다. 조금 먼 미래에 부자가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어색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엄마를 보러 한국에 가서, 엄마하고 같이 먹고 싶은 것을 며칠이고 사 먹을 수 있는 만큼 여유가 있었으면 한다. 조금 더 보태서 함께 가고 싶은 곳은 며칠이고 갈 수 있을 만큼은 벌었으면 좋겠다. 나는 부모님의 자서전을 쓰고 부자가 되었다. 내가 부자가 됐다는 말은 농담이지만, 지금부터 시작하는 부자 되기 프로젝트는 농담이 아니다. 진심이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