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욱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10여 년이 넘도록 섬겨오던 교회 부속 문화 단체인 에버그린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온 한 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젊어서는 영어 선생님으로, 미 8군에서 통역도 하셨고 인문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으신 나름의 내공과 식견이 높은 분이었다. 그날은 그분과 줄탁동시(啐琢同時)라는 고사성어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의 이 단어는 서로가 합심하여 최선을 다할 때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그러나 만약에 타이밍이 어긋나게 된다면 병아리는 이소(離巢)가 가능하더라도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 이라는 이야기와, 우리의 가정이나 사회 공동체 생활 등에도 줄탁동시는 필연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기에 어떤 꼭 필요한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만들기 위해서는 늘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 그날의 화두였다.
줄탁동시의 뜻을 새겨보는 중에 우리는 내심 자식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한 번도 부모로써 제대로 ‘탁’을 해준 적이 없는것만 같았다. 큰 아이가 치과대학 면접을 보던 날, 북미 전체에서 모인 경쟁 상대이자 많은 응시자 중에는 대대로 의사 집안이거나 해당 대학의 기부자들의 자제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암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땅에 깊은 뿌리가 없는 이민자의 자식으로서 다행히 합격이 된 건 순전히 이 땅의 공정한 심사제도와 본인의 줄기찬 쪼아댐(茁), 그리고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우리 내외의 기도 덕분으로 여기며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줄탁동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식들의 성공에 대한 집착이나 안달보다 때를 맞춰(同時) 주는 부모의 지혜가 더 중요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란 자식들이 부모의 조언을 갈급해하는 그들 인생의 갈림길에 선 순간일 것이다. 그때를 민감하게 살피며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식들의 정신적 지표를 준비해 주는 게 부모의 진정한 탁(啄) 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줄탁동시가 어려운 건 부모가 가진 능력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완급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랑이 너무 지나치면 자식을 의존형 인간으로 버리게 되고, 너무 부족하면 사랑 결핍증에 평생을 시달리는 것을 주위에서 흔히 보아온 터다. 이민의 삶 자체가 어려웠던 탓도 있겠지만 나로선 자식이 혼자 힘으로 일어서도록 내버려 두는 게 온당한 자식 사랑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변명 같지만 두 아이를 키우면서 고치를 홀로 뚫고 나오는 나비 얘기를 곧잘 들려주었다. “얘들아, 애벌레의 고생이 애처로워 누군가가 고치 집 끝을 조금 뜯어 주었단다. 그랬더니 나비의 날개에 힘이 붙질 않아 날지 못하더란다. 고치를 억지로 비집고 나오는 순간, 날개 쪽으로 피가 몰리며 힘이 붙는단다. 젊어서 고생은 생존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란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말고 홀로서기를 배워라.” 그래서인지 아들이 병원 이름을 ‘Chrysalis Dental Centres’라고 명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지표를 준비해 주는 과정에서 자식들이 껍데기를 막 깨고 나오려고 할 때, 그 신음을 듣는 이도 있고 아예 듣지도 못하거나 혹은 듣고도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부족하더라도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일텐데, 자식들이 이만큼 성장하도록 지표 삼을 만한 삶을 보여주지 못한 어리석은 아비로서 새삼 할 말이 없다. 그저 늘 기도 할 뿐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전혀 없고 단순한 정글의 법칙만이 만연한 경쟁사회에 내몰려 자신의 능력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있는 요즈음의 모습에 줄탁동시라는 사자성어가 참으로 절실한 때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끝으로 내가 줄(啐) 하고 싶을 때, 탁(啄)해 주실 분은 바로 그대뿐임을 알기에 오랜만에 에버그린 연배분과 식사를 끝내며, 바로 지금 내 앞의 분의 손을 꽉 한번 잡아본다. 그리고 에벤에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내 남은 껍질을 두드려 주시기를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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