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광고문의
연락처: 604-877-1178

줄탁동시의 지혜

권순욱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05-13 09:19

권순욱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10여 년이 넘도록 섬겨오던 교회 부속 문화 단체인 에버그린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온 한 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젊어서는 영어 선생님으로, 미 8군에서 통역도 하셨고 인문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으신 나름의 내공과 식견이 높은 분이었다.   그날은 그분과 줄탁동시(啐琢同時)라는 고사성어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의 이 단어는 서로가 합심하여 최선을 다할 때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그러나 만약에 타이밍이 어긋나게 된다면 병아리는 이소(離巢)가 가능하더라도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 이라는 이야기와, 우리의  가정이나 사회 공동체 생활 등에도 줄탁동시는 필연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기에  어떤 꼭 필요한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만들기 위해서는 늘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 그날의 화두였다.
 
   줄탁동시의 뜻을 새겨보는 중에 우리는 내심 자식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한 번도 부모로써 제대로 ‘탁’을 해준 적이 없는것만 같았다.  큰 아이가 치과대학 면접을 보던 날, 북미 전체에서 모인 경쟁 상대이자 많은 응시자 중에는 대대로 의사 집안이거나 해당 대학의 기부자들의 자제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암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땅에 깊은 뿌리가 없는 이민자의 자식으로서 다행히 합격이 된 건 순전히 이 땅의 공정한 심사제도와 본인의 줄기찬 쪼아댐(茁), 그리고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우리 내외의 기도 덕분으로 여기며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줄탁동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식들의 성공에 대한 집착이나 안달보다 때를 맞춰(同時) 주는 부모의 지혜가 더 중요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란 자식들이 부모의 조언을 갈급해하는 그들 인생의 갈림길에 선 순간일 것이다. 그때를 민감하게 살피며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식들의 정신적 지표를 준비해 주는 게 부모의 진정한 탁(啄) 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줄탁동시가 어려운 건 부모가 가진 능력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완급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랑이 너무 지나치면   자식을 의존형 인간으로 버리게 되고, 너무 부족하면   사랑 결핍증에 평생을 시달리는 것을 주위에서 흔히 보아온 터다. 이민의 삶 자체가 어려웠던 탓도 있겠지만  나로선 자식이 혼자 힘으로 일어서도록 내버려 두는 게 온당한 자식 사랑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변명 같지만 두 아이를 키우면서 고치를 홀로 뚫고 나오는 나비 얘기를 곧잘 들려주었다. “얘들아, 애벌레의 고생이 애처로워 누군가가 고치 집 끝을 조금 뜯어 주었단다. 그랬더니 나비의 날개에 힘이 붙질 않아 날지 못하더란다. 고치를 억지로 비집고 나오는 순간, 날개 쪽으로 피가 몰리며 힘이 붙는단다. 젊어서 고생은 생존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란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말고 홀로서기를 배워라.” 그래서인지 아들이 병원 이름을 ‘Chrysalis Dental Centres’라고 명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지표를 준비해 주는 과정에서 자식들이 껍데기를   막 깨고 나오려고 할 때, 그 신음을 듣는 이도 있고 아예 듣지도 못하거나 혹은 듣고도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부족하더라도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일텐데,   자식들이 이만큼 성장하도록 지표 삼을 만한 삶을 보여주지 못한 어리석은 아비로서 새삼 할 말이 없다. 그저 늘 기도 할 뿐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전혀 없고 단순한 정글의 법칙만이 만연한 경쟁사회에 내몰려 자신의 능력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있는 요즈음의 모습에 줄탁동시라는 사자성어가 참으로 절실한 때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끝으로 내가 줄(啐) 하고 싶을 때, 탁(啄)해 주실 분은 바로 그대뿐임을 알기에 오랜만에 에버그린 연배분과 식사를 끝내며,  바로 지금 내 앞의 분의 손을 꽉 한번 잡아본다. 그리고 에벤에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내 남은 껍질을 두드려 주시기를 기도 드린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맨 아래 칸 서랍 2025.12.01 (월)
맨 아래 칸 서랍이즈음 옷장의 맨 아래 칸 서랍을 정리하는 날이 부쩍 늘었다놓지 못해 떠나지 못한 내 어제의 그림자들이 매미 허물같이 모여 사는 곳돌쩌귀도 녹스는 늙은 세월에 대부분은 떠나고몇은 아직 남아서 민속촌처럼 함께 저무는 그곳엔늦가을 저녁의 체온 닮은 바람이 분다내가 거쳐온 삶의 간이역들이 펼쳐진다순진한 젊은 별바라기의 풋꿈도자갈길에 땀 흘리던 이민(移民)의 한여름날도오래전에 잃어버린 시(詩)를...
안봉자
내가 살던 낙동강 상류에는 유달리 풀꽃이 많았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그 풀꽃을 따서 강물에 띄워 보내며 들찔레 새순을 꺾어 먹던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 이웃에 초등학교 선생 한 분이 계셨다. 어린 내 눈엔 그분이 늘 우러러 보였다. 강마을, 농촌에서 태어나 비범한 재주도 없을 것 같아 소년 적 꿈이래야 고향 초등학교 훈장이 되어 풀꽃처럼 사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어려서 나는 책 읽기를 좋아 했다. 그 때는 읽을 책도 많지...
권순욱
시간(時間) 2025.12.01 (월)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라진다고 말한다.마치 인생의 모래시계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기울어져 모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하지만 젊은 시절의 시간은 전혀 다르다.아직 모래시계의 윗부분이 가득 찬 채 천천히, 그리고 지루할 만큼 느릿하게 모래알이 떨어지던 시절 —나에게 그 시절은 바로 10대였다. 국민(초등)학교 시절의 하루는 끝없는 여정이었다.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는 그 작은 꿈조차...
우제용
세월이란 길 위로시간은 물결처럼 흘러가고천천히 스며드는 듯 하다가도돌아보면 한순간의 빛처럼 멀어져 간다 머물 줄 모르는 그 흐름 속에서소중했던 날들조용히 견뎌낸 순간들은가슴 깊은 곳에고운 흔적으로 남아추억이 되어 숨 쉰다 아쉬움이 스치는 기억함께 웃음꽃 피우던 날들의 온기아직도 마음속에서 잔잔히 물결치고참 따스했고 참 고왔던그 멋진 순간들조용한 기쁨이 되어지금도 내 손을 잡아 준다 세월의 길 위에서날 웃게...
나영표
선택 2025.11.24 (월)
  2016년 2월 12일, 나는 에어 캐나다의 서울행 비행기에 있었다. 어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급하게 자리를 하나 구해서 다음날 출발할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급한 대로 나에게 벌을 내리고 싶었다. 밤을 헤치고 달려서 도착한 오랜만의 인천 공항은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한 한국어로 물어물어 공항을 빠져나왔다. 연락받고 공항까지 마중 나온 친구들의 도움으로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생각과 달리 눈물이...
예종희
한 해를 보내며 2025.11.24 (월)
한 해를 보내며                     로터스 정병연 지나온 세월이여 그대는 내 마음에 깊이 머무네푸른 하늘 아래 서서 햇빛이 내리는 곳에서 나는 한 송이 꽃이 되어 열심히 피어났노라 흔들린 꽃잎 위에 지나온 시간이 내려앉고 기쁨도 슬픔도 모두 빛이 되어 나를 채웠네오늘도 감사하노라 여기까지 걸어온 길 땀과 눈물로 일군 날들 모두가 축복이었음을 이제 한...
로터스 정병연
  요즈음 예전에 손주들과 같이 지내며 찍은 사진들을 보면 남편도 나도 그때는 이렇게 젊었었구나 하고 새삼 놀란다. 10년 전 사진을 보면 완전히 젊은 청장년 같고, 불과 2, 3년 전에 찍은 최근 사진들도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아니, 언제 이리 늙어진 것인지 세월이 날아가는 것 같다.   청 중년에서 장년으로 되면서 늙어 간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70세가 넘으면서 거울 속에 비치는 많은 흰머리와 약해진 피부 탄력에...
김현옥
소망의 씨앗은청춘 언저리에 쌓여들썩거리는데노안의 이 가슴은씀벅씀벅 아리다 뭉게구름 몽실 그리움 피우고낙심의 구름 회색 물로 울먹이고절망의 구름은 먹물을 토해 놓고무거워진 솜털 기다림으로 말린다 하늘에 사는 구름도저리 갈팡질팡하는데땅에 사는 우리네오죽하겠는가 우리, 그저바람 먹고 구름 보고꽉 찬 욕심에 쓰린 가슴 뒤집어로키의 침묵 속에 부려 놓고까짓거 나를 잊는 것도 좋으리나를 지우면 너가...
한부연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