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말의 기운(언어 심리)

이명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05-13 09:17

이명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사람의 본성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이 정설인지, 악담인지 모르겠으나,
머리가 허연 부부로 살기까지 반은 개과천선한 것 같다.
 
 신혼 초 남편은 지-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은연중에 ‘제기랄’, ‘염병할’ 등 감탄사를 내 뱉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왜 그런 말투를 쓰냐고 했더니 현장에서 듣던 욕이 입에 배었다고
미안하다며 바로 고쳤다. 언어의 수난은 수산물 좌판 아줌마의 찰진 욕으로 이어졌다. 서울
새댁의 똑 떨어진 표준말이 시장통 아줌마에게 정이 없어 보였는지 가격을 물었더니 냅다
욕으로 받아 쳐 객지 생활이 녹록하지 않음을 실감했다. 어느 날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
입에서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욕과 우울감은 전염력이 강하다. 나와 성향이 다른 둘째
언니가 ‘너도 어쩔 수 없구나!’라며 비웃었다. 투명한 유리에 파편이 튀듯 나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객지에서 연년생을 홀로 키우다 보니 과부하가 난 것 같다. 남편이 나 한테
깡패가 됐다고 한다. 배우들의 욕 연기가 친근한 것은 감칠맛 나는 욕에서 인간미를 느끼고
대리만족하기 때문이다. 처녀 때는 별명이 ‘매너 리’였는데 12년 객지 생활은 내게 가장
힘들었던 구간이다.
 
 객지 생활과 해외 생활의 역마가 풀리지 않은 채 언니. 오빠들처럼 늙었다. 큰언니가 허리
골절 수술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독자인 아들이 해외에 살아 퇴원 후 돌볼 사람이 없어
전화통을 하루 종일 붙잡고 형제들과 의논하여 병원비와 퇴원 후의 조치까지 해결했다.
언니. 오빠들의 연령대가 칠십 후반에서 팔십 초반이다 보니 육십 중반인 내가 교통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입만 살고, 행동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합심을 얻어내지 못했을
텐데, 소통에 진심이며 이해를 받기까지 최선을 다했던 터라, 신뢰를 받은 것 같다. 형제끼리
오해가 있을 땐 중간에서 해결사 노릇을 했다. 이번 일로 형제들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졌다.
큰언니가 ‘막내야, 수고했다! 네가 중간에서 말을 잘해 해결되었구나.’라며 고마워했다.
 
 젊은 시절엔 조용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말이 많아졌다. 무성 영화의 변사처럼 자리만
펴주면 쉬지 않고 떠드니 형제들도 놀란다. ‘얌전한 애가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따지고
보면 어릴 땐 발언권이 없었고, 처녀 땐 자존심으로 침묵했고, 결혼해서는 맞벌이로 바빴다.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캐릭터가 변한 것 같다. 가르치는 직업 특성상 말이 늘었고, 경우
없다는 소릴 듣지 않으려고 부연 설명을 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맺힌 게 많으면 터트려야
할 물꼬도 많은가 보다.
 
 우둔한 사람을 ‘새대가리’라고 한다. 새의 뇌가 작아 본능에 따라 살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곰처럼 느린 사람보다 새처럼 빠른 사람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속으로 곪아 병이 되는
곰탱이보다 ‘나 전달법’의 수다쟁이가 관계를 쉽게 풀 수 있다. 어미 새도 우는 새끼한테
먼저 밥을 주듯이 짹짹거리는 건 자기표현이며 의사 전달이다. 문헌에는 새와 곰의 지능이
설화와 다르다고 하지만 말을 안 하고 속에 담아 두는 건 두뇌 쪽보다 성격에 가깝다. 예쁜
꽃을 보고 탄성을 지르거나, 새와 대화를 나누는 건 감성이 살아 있는 거다. 비경을 보고도
묵언 수행한다면 감성이 막힌 거다. 마음의 병이 들면 말수가 적어지고 사람과 담을 쌓거나,
반대로 말이 많아지며 감정이 들쑥날쑥하다. 또한 ‘건드리기만 해 봐, 공격에 들어갈
거야.’라는 위험한 태세를 갖춘다.
 
 심리학에서 ‘사람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진 구간은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시간은 기억해야 한다. 대화에는 듣기 싫고

거북한 대화도 있는데, 노인이 되면 대화의 핵심은 놓치고,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며, 자기
말만 하고, 했던 말을 반복하며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꼬장꼬장한 성미는 융통성이 없고,
속이 단단해서 생긴 기질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내게 귀감을 주는 자서전이었다. 죽음을 앞둔 노령의 작가가
정신 줄을 놓지 않고, 인터뷰할 때마다 말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살아생전, 이어령의 회갑연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려주었다. TV 상자 안의 말(馬) 그림과
TV 상자 안의 입술(말 言이 터지는 통로) 그림이었다. 말(言)이라는 무기를 들고, 말(馬
)달리는 자가 이어령이었다.’ 작가는 죽음 앞에서도 한점의 흐트러짐이 없이 과거, 현재의
삶을 조망하며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갈 지표를 전해 주었다. 놀라운 건 작가가 어릴 때
느꼈던 죽음과 노인이 되어 겪는 죽음에 간극이 없다는 점이다. 작가는 인터뷰 내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실천하듯 인문, 철학, 신학의 진리를 펼치며 겸손하게 죽음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 날 지인의 남편이 관공서 직원에게 심하게 욕하는 걸 보고, 남편에게 감사한 적이
있다. ‘깨달음은 억겁을 윤회하며 닦을 수도 있고, 전광석화처럼 일시에 개오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말버릇은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는데, 내 귀를 깨끗이 해주는 남편이
새삼 고마웠다. 남편과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생각이 일치했는데 남은
삶을 잘 살려면 말을 아껴야 한다는 거였다. 말이 많을수록 주고받는 게 상처다. 말로 상처를
받으면 싱싱했던 꽃이 시들어 쓰레기통에 넣을 때처럼 찝찝하고 허무하다.
 
 말에도 시너지 효과가 있다. 말에 고운 옷을 입히거나 돌려 말하거나 침묵하면 심간이
편해지는 효과다. 로키의 설산도 여름이 돼야 녹듯이, 말의 온도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높거나 낮은 톤, 감정이 섞인 말은 시간을 두고 고쳐야 한다. 서양의 ‘Shut Up'은 의역하자면
침묵하라는 건데, 침묵도 연습이 필요하다. 악보에 음표와 쉼표가 있듯이 말을 줄이거나,
쉬어가야 삶의 갈무리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모래성 2025.05.30 (금)
아무도 없는 바닷가홀로 선 모래성바람이 지우고파도가 무너뜨려다시 해변의 모래가 되겠지 쉼 없이 움직이는 개미가한 톨 한 톨 쌓아 올린 모래성그 긴 시간과 땀방울들은그들의 삶의 기억으로 남겠지 흔적도 없이흙이 되어 버린바벨의 탑처럼우주로 심해로 뻗어가는 야망도모래성이 되겠지 그래도 지금을 사는개미들은 부지런히모래성을 지어야지그들의 삶을 위해
송무석
 오늘도 워커를 짚고 길을 나선다. 2년 전 교통사고로 손상된 몸을 재활하려고 헬스장(gym)이나 피트니스 센터에 가기 위해서이다.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버스를 이용한다. “Please lower the lift." 나는 버스를 타고 내릴 때마다 입버릇처럼 운전기사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어느 때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도와주겠다며 장애인 좌석으로 다가와 서 있는 승객도 있다. 버스가 정차하면 그 사람은 내 워커를 들고 먼저 하차한다. 그리고 자기 옆으로...
심현숙
   커피를 주문할 때 우유를 넣어 부드럽게 마시려면 약간의 공간을 남겨야 한다. 김치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통에 담을 때도 여유가 필요하다. 꽉꽉 눌러 담은 김치는 발효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가스 때문에 국물이 흘러 넘쳐 냉장고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채득 하는 데도 여러 번의 실수와 후회를 반복했다.  인생의 기나긴 항로 속에서 갈 곳을 잃고 헤맬 때가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숨 막히는...
권은경
위로 2025.05.30 (금)
     복은 빌 수 있어도     몸이 견뎌야 하는 일은     심산 절간에 간다 한들     빌어서 될 일이 아니더군     하늘 문 두드려     그 꽃밭 언저리에 앉았어도     몸이 해 할 몫은     몸으로 견뎌 헤쳐가는 것      생멸의 시간을 함께 숨쉬는     몸과 마음의 인연은     멀고도 길고도 무거운     2인3각 억겁의...
조규남
오월이 오면 2025.05.23 (금)
 어머니를 기리는 오월이면하늘에 어머니가 바람으로 다녀가십니다꽃을 피우는 따스한 손길로내 이마를 쓰다듬으며수고했다 장하다 다독이십니다훅 코끝에 감겨오는 살냄새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댑니다어머니는 봄처럼 푸른 꿈을 낳으시고산처럼 든든해라 강처럼 푸르러라세상에 이로운 이름으로 기르셨습니다가슴에 카네이션 달아드리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꽃 대신 어머니를 꼬옥 끌어안아 드릴 텐데'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귀청을...
임현숙
  "언니!"  한국에 있는 동생의 한마디 문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언니, 엄마가 숨쉬기를 힘들어 하세요!"   페이스톡을 연결해 엄마의 상태를 보았다. 숨결이 얼마 남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엄마 귀에 전화기를 대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사랑해요." 를 수없이 고백하며. 그동안 엄마 기억에 섭섭하고, 잘못한 것 다 용서해주시라고... 멀리 있다는 핑계로 딸 노릇 제대로...
박명숙
한마디 말 2025.05.23 (금)
  “땡스 어 라떼. (Thanks - A - Latte! )“   내가 주문한 음료가 담긴 컵 앞면에 직접 펜으로 쓴 문구와 아래에는 스마일 이모티콘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아주 새롭고,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뭐지?’ 하면서 처음에 이것이 무슨 뜻일까,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긴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 고맙다 (Thanks a lot)’ 는 말을 라떼음료에 빗대어 유머적으로 표현한 말 같기도 하고, 내가 라떼 음료를 시켜서 감사하다는 말...
정재욱
텃밭의 하루 2025.05.23 (금)
봄날 씨를 뿌린다흙을 덮고 일어서는데둥글고 붉은 씨알이금세 흙을 떨치고 나와쪼그리고 앉아 본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크고 튼실한 알곡 한 톨힘을 다해 턱에 올려 물고반짝이는 까만 등허리로길을 여는 개미 한 마리 기다릴 새도 없이싹틀 기회를 놓쳐버린안타까운 마음 가득 담아독한 심술 부려보지만떨어낸 알곡 다시 부둥켜막힌 길 돌아가는 개미 집으로 가는 길목군살 없는 그 허리 위로솟아올라 굽은 잔등이에저녁...
강은소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