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사람의 본성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이 정설인지, 악담인지 모르겠으나,
머리가 허연 부부로 살기까지 반은 개과천선한 것 같다.
신혼 초 남편은 지-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은연중에 ‘제기랄’, ‘염병할’ 등 감탄사를 내 뱉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왜 그런 말투를 쓰냐고 했더니 현장에서 듣던 욕이 입에 배었다고
미안하다며 바로 고쳤다. 언어의 수난은 수산물 좌판 아줌마의 찰진 욕으로 이어졌다. 서울
새댁의 똑 떨어진 표준말이 시장통 아줌마에게 정이 없어 보였는지 가격을 물었더니 냅다
욕으로 받아 쳐 객지 생활이 녹록하지 않음을 실감했다. 어느 날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
입에서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욕과 우울감은 전염력이 강하다. 나와 성향이 다른 둘째
언니가 ‘너도 어쩔 수 없구나!’라며 비웃었다. 투명한 유리에 파편이 튀듯 나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객지에서 연년생을 홀로 키우다 보니 과부하가 난 것 같다. 남편이 나 한테
깡패가 됐다고 한다. 배우들의 욕 연기가 친근한 것은 감칠맛 나는 욕에서 인간미를 느끼고
대리만족하기 때문이다. 처녀 때는 별명이 ‘매너 리’였는데 12년 객지 생활은 내게 가장
힘들었던 구간이다.
객지 생활과 해외 생활의 역마가 풀리지 않은 채 언니. 오빠들처럼 늙었다. 큰언니가 허리
골절 수술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독자인 아들이 해외에 살아 퇴원 후 돌볼 사람이 없어
전화통을 하루 종일 붙잡고 형제들과 의논하여 병원비와 퇴원 후의 조치까지 해결했다.
언니. 오빠들의 연령대가 칠십 후반에서 팔십 초반이다 보니 육십 중반인 내가 교통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입만 살고, 행동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합심을 얻어내지 못했을
텐데, 소통에 진심이며 이해를 받기까지 최선을 다했던 터라, 신뢰를 받은 것 같다. 형제끼리
오해가 있을 땐 중간에서 해결사 노릇을 했다. 이번 일로 형제들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졌다.
큰언니가 ‘막내야, 수고했다! 네가 중간에서 말을 잘해 해결되었구나.’라며 고마워했다.
젊은 시절엔 조용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말이 많아졌다. 무성 영화의 변사처럼 자리만
펴주면 쉬지 않고 떠드니 형제들도 놀란다. ‘얌전한 애가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따지고
보면 어릴 땐 발언권이 없었고, 처녀 땐 자존심으로 침묵했고, 결혼해서는 맞벌이로 바빴다.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캐릭터가 변한 것 같다. 가르치는 직업 특성상 말이 늘었고, 경우
없다는 소릴 듣지 않으려고 부연 설명을 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맺힌 게 많으면 터트려야
할 물꼬도 많은가 보다.
우둔한 사람을 ‘새대가리’라고 한다. 새의 뇌가 작아 본능에 따라 살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곰처럼 느린 사람보다 새처럼 빠른 사람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속으로 곪아 병이 되는
곰탱이보다 ‘나 전달법’의 수다쟁이가 관계를 쉽게 풀 수 있다. 어미 새도 우는 새끼한테
먼저 밥을 주듯이 짹짹거리는 건 자기표현이며 의사 전달이다. 문헌에는 새와 곰의 지능이
설화와 다르다고 하지만 말을 안 하고 속에 담아 두는 건 두뇌 쪽보다 성격에 가깝다. 예쁜
꽃을 보고 탄성을 지르거나, 새와 대화를 나누는 건 감성이 살아 있는 거다. 비경을 보고도
묵언 수행한다면 감성이 막힌 거다. 마음의 병이 들면 말수가 적어지고 사람과 담을 쌓거나,
반대로 말이 많아지며 감정이 들쑥날쑥하다. 또한 ‘건드리기만 해 봐, 공격에 들어갈
거야.’라는 위험한 태세를 갖춘다.
심리학에서 ‘사람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진 구간은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시간은 기억해야 한다. 대화에는 듣기 싫고
거북한 대화도 있는데, 노인이 되면 대화의 핵심은 놓치고,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며, 자기
말만 하고, 했던 말을 반복하며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꼬장꼬장한 성미는 융통성이 없고,
속이 단단해서 생긴 기질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내게 귀감을 주는 자서전이었다. 죽음을 앞둔 노령의 작가가
정신 줄을 놓지 않고, 인터뷰할 때마다 말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살아생전, 이어령의 회갑연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려주었다. TV 상자 안의 말(馬) 그림과
TV 상자 안의 입술(말 言이 터지는 통로) 그림이었다. 말(言)이라는 무기를 들고, 말(馬
)달리는 자가 이어령이었다.’ 작가는 죽음 앞에서도 한점의 흐트러짐이 없이 과거, 현재의
삶을 조망하며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갈 지표를 전해 주었다. 놀라운 건 작가가 어릴 때
느꼈던 죽음과 노인이 되어 겪는 죽음에 간극이 없다는 점이다. 작가는 인터뷰 내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실천하듯 인문, 철학, 신학의 진리를 펼치며 겸손하게 죽음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 날 지인의 남편이 관공서 직원에게 심하게 욕하는 걸 보고, 남편에게 감사한 적이
있다. ‘깨달음은 억겁을 윤회하며 닦을 수도 있고, 전광석화처럼 일시에 개오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말버릇은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는데, 내 귀를 깨끗이 해주는 남편이
새삼 고마웠다. 남편과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생각이 일치했는데 남은
삶을 잘 살려면 말을 아껴야 한다는 거였다. 말이 많을수록 주고받는 게 상처다. 말로 상처를
받으면 싱싱했던 꽃이 시들어 쓰레기통에 넣을 때처럼 찝찝하고 허무하다.
말에도 시너지 효과가 있다. 말에 고운 옷을 입히거나 돌려 말하거나 침묵하면 심간이
편해지는 효과다. 로키의 설산도 여름이 돼야 녹듯이, 말의 온도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높거나 낮은 톤, 감정이 섞인 말은 시간을 두고 고쳐야 한다. 서양의 ‘Shut Up'은 의역하자면
침묵하라는 건데, 침묵도 연습이 필요하다. 악보에 음표와 쉼표가 있듯이 말을 줄이거나,
쉬어가야 삶의 갈무리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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