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높이 솟은 건물과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의 중심에는 대형 쇼핑몰이 있다. 복닥 복닥 사람들이 붐비는 공간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천체처럼 나름의 질서와 규칙에 따라 존재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 문과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마치 빛나는 별들의 행렬처럼 장관을 이룬다. 목을 길게 빼고 쇼핑몰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는 나는 영락없이 외지인이다. 2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대도시의 변화에 바로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마치 낯선 행성에 떠 있는 외계인이 된 듯 발 붙일 곳을 찾았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위치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대학 시절 절친했던 친구들은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돌아보면, 순수함과 유쾌함으로 가득했던 나의 20대에는 그들이 있었다. 우리는 순수했고, 서로에게 거짓 없이 대했으며, 모이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에 나가서도 자주 어울리며 변함없이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는 학교와 달랐고, 우리는 시간을 담보로 꿈을 사고 그 대가를 지불해야 했기에 점점 멀어져 갔다.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이 흐릿해지고, 사회적 통념에 갇혀 그저 그런 사회인이 되어가던 어느 날, 나는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우리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감이 생겼다. '수년 만에 보는 친구들은 얼마나 변해 있을까?'
나는 가장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친구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가슴이 뛰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리운 친구를 찾겠다는 마음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했다. 서로의 얼굴을 알아봤을 때 우리는 얼싸 안고 기쁨을 나눴다. 상대방을 향해서는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다고 칭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많이 늙었다며 낯을 붉혔다. 거울 속의 내 모습처럼 친구들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웃음 많던 20대의 대학생은 온데 간데 없고,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로운 중년 여성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자리에 모였다는 이유 만으로 젊은 날의 우정과 사랑을 소환해 냈고, 그때의 미소와 풋풋함을 되찾았다. 단절되었던 시간을 이어가려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 속에서 우리는 자주 감탄사를 터뜨렸다. 성공한 사업가로, 선량한 사회인으로, 좋은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 있는 친구들은 멋지게 자신의 삶을 숙성 시키고 있었다. 오고 가는 대화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평탄하지 만은 않았던 삶의 순간들과 눈물겨운 분투, 그리고 실패와 아픔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누구도 자신을 포장해 아름답게 보이려 하지 않았고, 과장되게 성취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사람과의 관계와 대화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살면서 우리의 인생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셀 수 없이 많다. 모든 인연이 내게 의미 있고 오래 기억에 남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매번 조금 더 진실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내가 바라던 대로 지속되지는 않았다. 인연에 얽매여 끌려 다니다가 곤경에 처하거나 아팠던 경험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가슴에도 하나 둘 씩 새겨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불필요한 관계의 피로와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세우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타인으로부터 마음을 숨기는 일에 능숙해질 즈음, 더는 남에게 쉽게 관심과 애정을 주지 않는 인색한 나를 발견했고,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 혐오스러웠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좋아했던 친구들을 만나니, 하늘 높이 솟아 있던 마음의 울타리가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하며 깊은 정을 나눴던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다 보니, 젊은 날 우리들의 모습이 눈부시게 되살아났다. 그 속에서 나는 허공에 떠 있던 두 발을 땅에 내리고, 아득한 추억 속에서 정겨운 고향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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