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봉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부회장
내가 그 녀석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오래전 어머니가 소개해 주신 날로 기억된다. 처음 만났을 땐 서먹서먹해 말을 걸기 어려웠고 사실 첫인상이 별로였다. 가끔 가족 행사 때 볼 수 있었지만, 그냥 본체만체하고 헤어지곤 했다. 그리고 그 녀석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골에서 전학 온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그 녀석과 녀석의 친구들이 온 천지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집안에 그 녀석의 풋풋한 향기가 가득 차 나도 모르게 취한 것 같았다. 그 녀석은 흙에서 태어나 태양을 사랑했고 바람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그 녀석의 몸엔 흙의 정직함, 태양의 따사로움, 그리고 진한 바람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난 그 녀석이 날이 갈수록 점점 좋아졌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서로 맛있는 대화를 나누었고 녀석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점차 친구 집에 놀러 가는 횟수가 늘었고 갈 때마다 녀석을 만나는 것이 그저 즐거웠다. 때로는 녀석과 늦게까지 놀다 저녁에 집에 함께 오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 네가 웬일이냐, 내가 소개할 땐 별로라고 하더니."라며 흐뭇해하셨다. 그리고 그 녀석을 아예 우리 집에 상주시키며 나와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라는 준엄한 책무를 내려주셨다. 매일 그와 함께 일찍 일어나 상쾌한 아침을 맞으며 맛있는 대화를 나누고 나면 내 마음과 몸이 튼튼해짐을 느꼈고, 어느새 내 체력 역시 놀랍도록 좋아졌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그 녀석과 잘 사귀라고 권하셨다.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친구와 매일 아침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노래하고 운동도 함께 했다.
그 후 고향을 떠나 혼자 자취를 시작하면서 그 녀석을 자주 만날 수 없게 되었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친구와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친구들 모임이나 행사장에서나 가끔 만날 수 있었고, 만나면 그때 잠깐씩 옛 생각이 나 그 녀석을 붙잡고 그동안의 그리움을 한꺼번에 풀곤 했다. 한편, 어머니는 객지 생활하는 나를 늘 걱정하시며 꼭 그 녀석과 함께 건전한 아침 시간을 함께하라고 당부하셨다. 어머니가 머무르시는 며칠 동안은 그 녀석과 아침마다 만날 수 있어서 속이 든든하고 활력이 넘치는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난 지속적으로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그 약속은 잘 지키지 못했다. 그 이후 상당 기간 그 녀석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우리 만남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매일 아침 나를 유혹하는 달콤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이제 오니?"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예고도 없이 내 앞에 그 녀석과 함께 나타나셨다.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 어머니가 오셔서 자취방을 정리하시고 밥을 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무슨 일로 연락도 없이 오셨어요?" 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더니 "연락하면 네가 못 오게 할까 그냥 왔다." 하시며 녀석들을 잔뜩 데려왔다. 당시 내 체력과 건강이 많이 안 좋은 상태였다. 건강을 챙기기는커녕 세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혹독한 직장 생활로 아침을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매일 야근에 야식 그리고 폭음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었다. 운동할 시간도 없었다. 이런 나를 보시고 어머니는 "아들! 제발 엄마 말 좀 들어. 내가 데려온 녀석들과 함께 매일 아침 만나 친하게 지내라. 그래야 네가 건강하지. 애들이 좀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몸에 좋은께 친하게 지내라. 응?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이 녀석들만 한 것이 없응께." 하시며 녀석들을 잔뜩 놓고 떠나셨다. 녀석들과 다시 재회를 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두고 가신 채로 그냥 방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그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짜증도 나고 보기도 싫어 못 본 척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난 후 지치고 우울한 표정의 그 녀석의 얼굴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한 녀석이 “ 어이 친구, 이제 나 좀 쳐다보지? 난 자네의 영육간 건강을 책임지러 왔다네. 그러니 이제 잘못된 아침 습관 버리고 나와 얘기 좀 하세.”하며 날 쏘아보았다. 난 처음엔 못 들은 척했으나 어머니의 당부가 생각나 멋쩍게 웃으며 쳐다봤다. 그리고 옛 생각을 하며 스스로 되돌아보고 다시 이 친구와의 만남을 이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다시 다정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고 제각각 성격의 녀석들과 함께 어울리며 신선한 아침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었다. 그 후 내 몸과 마음이 예전처럼 건강해지기 시작했고 얼굴빛도 환해졌다. 회사 일도 더 능률적으로 할 수 있었고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겨 활기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매일 아침에 만나는 그 녀석, 어느새 난 그 녀석의 예찬론자가 되었다. 어딜 가도 그 친구를 데려갔고 심지어 출장을 갈 때도 꼭 그 친구가 나의 동반자가 되었다. 때론 현지에서도 그 녀석의 개성있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난 내 주변의 모든 지인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매력에 반해 지금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녀석이 매일 아침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다. 매우 자극적인 이야기, 달콤하며 포근한 말투, 시작부터 아삭아삭한 표현, 맛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내용은 별로인 것, 가끔은 둘만의 대화보다는 녀석의 친구들과 함께 만날 때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 등, 몇십 년 동안 녀석과 함께 우정을 쌓아온 아침, 우리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을 기약한다. 이제 이 녀석은 내 생활의 소중한 일부가 되었다. 오늘 아침도 약속 장소에 어김없이 녀석이 먼저 나타났다. 서로 건강하게 웃는 얼굴로 반긴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 그 녀석과 난 어제의 묵은때를 제거하기 위해 깨끗이 씻고 몸가짐을 바로 한다. 그 녀석이 내게 먼저 묻는다. 어제 하루는 행복했냐고, 일기는 잘 썼냐고, 오늘은 어떤 계획이 있느냐고 등등 매일 날 챙기고 확인한다. 나의 일상을 묻는 친구의 홍조 띤 얼굴과 푸릇푸릇한 보조개, 그리고 흰 속살은 언제 보아도 상큼하다. 어찌나 예쁘고 앙증맞고 귀여운지 아삭 한 입 깨물어 주고 싶은 지경이다. 아침을 여는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싱싱하고 활기에 차 내게 행복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언제 만나도 질리지 않는 친구, 매일매일 신선한 녀석, 가슴에 묻어오는 흙 내음을 품고 여름의 태양 에너지를 머금은 채 내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주는 친구. 내일도 그 녀석을 만난다는 작은 설렘으로 힘찬 에너지가 생긴다. 소중한 내 친구 그 녀석의 이름은 '사과', 과일 중의 왕이다. 적어도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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