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팔자를 생각하다

정성화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4-04-08 14:49

정성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가져가야 할 짐들을 거실 가득히 늘어놓은 채, 남편은 가방에
짐을 챙겨 넣고 있다. 그가 짐 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다
시 떠난다는 게 실감 난다. 가방의 지퍼가 고장 났는지 닫히지 않
는다고 남편이 말한다. 그를 붙잡고 싶은 내 마음이 염력을
부린 듯하다.
남편은 파도 치는 바다로 고생하러 가면서도 아내의 눈치를 본
다. 뭘 사다 주면 좋겠느냐고 자꾸 묻는다.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드
는데 눈물이 또 주책을 부린다.

 냉장고 문을 열고 낮에 사온 고등어를 꺼낸다. 마음이 허둥댈
때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게 낫다. 고등어 배를 갈라 내장을
훑어내고 소금을 치면서, 내 속에도 누가 이렇게 소금을 쳐주었
으면 좋겠다 싶다. 속이 상하지 않게 한 움큼 뿌려주었으면.

  그가 떠난 지 일주일 쯤 될 무렵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그리움
에 대한 항체가 생기려고 그러는지, 거실 한쪽에 앉아있던 햇살
몇 줄기도 이 공간의 적요를 견디기 힘든지 엉덩이를 뒤로 빼
며 슬금 슬금 빠져나간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오는 이 하나 없고
걸려오는 전화 한 통 없는 날이면, 주방 문을 열었을 때 간장병이
라도 하나쯤 넘어져 있기를 바라게 된다.

  해질 무렵이 더 쓸쓸하다. 누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며
맞이하는 시간이라서 그럴까. 나도 다른 아내들처럼 저녁상을 마
주하고 앉아 남편에게 이것 맛있지요 저것도 맛있지요 하며, 생
선살도 발라주며, 그렇게 오순도순 살아가고 싶다.

  이승에서의 삶이 전생의 엎을 갚기 위한 것이라면, 나의 전
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전생에 나의 배우자를 무척
기다리게 했던 모양이다. 나였더라면, 변방을 지키느라고 일 년
에 서너 번밖에 고향에 갈 수 없는 졸병이었던지, 아니면 전국 방
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보부상이었던지, 아니면 우국충정으로 만
주 벌판을 헤매고 다닌 독립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팔자(8)는 뒤집어도 같은 모양이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처
음 출발한 점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
의 팔자 또한 뒤집히지 않으며, 벗어나 보려고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

 팔자(8)는 옆으로 뉘여보면 00모양이 되어 편안해 보인다. 그
런데 00는 수학에서 무한대를 의미하는 기호다. 나의 팔자를 모
로 뉘여서 행여 지금의 외로운 팔자로 무한히 이어지게 될까봐
얼른 도로 세워 놓는다. 숫자 8을 보고 있으면, 길게 눕지도 못하
고 우두커니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아마 나의 쓸쓸함 때문일 것이다.

 편안하고 아늑하며 외롭지 않은 자리일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철저하게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 나는 오히려 신의 눈길을 느낀
다. 시험지를 내주고는 뒷짐을 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선생
님 같은, 신, 내가 마음에 쓰이는지 나의 등 뒤에서 꽤 오래 머물러
있는 신이다. 그래서였을가. 내 삶의 시험지 칸을 적당히 메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무엇인가 더 채워 넣어야한다는
생각이 봄풀처럼 돋아났다.

 내 속을 뚫고 삐죽이 튀어나오는 외로움과 아픔을 벼려줄 그
무엇이 있었으면 싶었다. 내 삶의 모서리를 공글려 줄 그 무엇, 수
필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수수하면서도 단아해 보이고
온순하면서도 심지가 강한 여인, 반듯한 이마를 가진 어느 조
선의 여인 같은 이미지로 , 수필에 귀를 대고 있으면 등을 토닥여 주
는 소리가, 마음을 씻어주는 소리가, 그리고 흐트러진 마음을 내
려치는 죽비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어느 판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두고두고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
람들과 닮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의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 떠올
리기만 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볼 때마다 또 다른 나를
보는 듯이 느껴지는 사람, 손 흔들며 헤어질 때는 비질 비질 눈물이
날 것 같은 사람과 닮았으면 좋겠다. 내게 있어 글쓰기란 쓸쓸함에
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아니라, 넘어져 있는 간장병을 세워주는 것
에서 시작되고 부박한 삶들을 껴안는 게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가슴 속에다 그리움으로 빚은 콩나물 시루를 하나 안쳐
두었다. 그 시루 위로 하루에도 몇 번 씩 물을 붓는다. 때로는 조급
한 마음이 일어 한꺼번에 몇 바가지 씩 퍼붓기도 한다. 어떤 콩 알
갱이는 눈을 뜨고 내다보는데 어떤 것은 야속하게 기척도 없다.
또 어떤 것은 순하게 싹을 내는데 어떤 것은 잔발만 무성하다.
나는 기다린다, 내 가슴속 콩나물 시루에 소복하게 콩나물이 자
라 오르기를. 그래서 어느 날 한 움큼 솎아 낸 콩나물이 내 삶에
아름다운 시가 되고 수필이 되기를.
아,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나의 팔자여!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마지막 정류장 2025.10.31 (금)
해 저문 골목 어귀어느 사람의 하루가 천천히 닫힌다 생(生)을 실은 버스 한 대낯선 정류장에 멈추고모래시계의 마지막 알갱이를 따라앞좌석의 누군가가문 쪽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여직흘러내리는 시간을 바라보며가라앉은 시간의 틈을 더듬어 본다 오래된 햇살 같은 이름 하나젖은 이불 깃에 스며든바람의 온도 창밖의 어둠 속으로사람들은 하나둘 그림자를 거두고나는 묵묵히 남은 모래알을 세고 있다 어쩌면 이 기다림은빛...
임현숙
기억의 집 2025.10.31 (금)
  가을빛 향연에 이끌려 길을 나선다.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단풍나무 숲을 지나 산책길 끝의 공원묘지로 향한다. 캐나다의 공원묘지는 삶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에도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운 햇살과 잘 가꿔진 잔디와 꽃들 사이를 거닐며, 죽음 또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이 자연스레 스며들기 때문일 것이다.    ‘툭’ 하고 단풍잎 하나가 어깨 위로 떨어진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민정희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아이도 많고 큰 개도 키우다 보니, 우리 집은 항상 물건이 넘친다. 희한하게도 분명 자주자주 비워내고 있지만, 어느새 비워둔 그 자리에 또 다른 물건이 쌓여 있고, 채워 지고의 반복이다. 아마 나도 모르게 비우지 못하고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성향을 가졌을 지 모르겠다. 마침 이를 깨닫게 된 경험을 얼마 전 하게 되었다.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전의...
윤의정
나무와 나무 틈새 바위와 바위 틈새눈보라 살을 비벼 맞는 통한의 세모빙하도 꽃을 피운다 틈새를 메워가며 저문 노을의 궤적 가득 찬 산 허리에꼬장한 바람들이 뒤집는 산촌 풍경*삭(朔)지나 걸어 나오는 대비조차 멋진 달 로키는 돌아누워 내면의 싸움터에든든한 후원자로 교만을 경고한다무성한 내 안뜰 악습 온기 없이 싸늘한 이 겨울 민 낮 들어 땟국을 벗고 싶다로키여 수세 몰려 경(景)을 포기하지 마라白樺皮 흰 속살마저 틈새를 메워...
이상목
미조(迷鳥) 2025.10.24 (금)
  단영은 유미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 유미의 태몽은 강렬했다. 조류를 무서워하는 단영에게는 잊힐 수 없는 그럼 꿈이었다. 커다란 기와집 대문 중앙에 서 있던 단영은 무거운 대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작은 틈 사이를 비집고 집 안으로 들어선 건 윤기가 흐르는 까만빛의 새였다. 새는 긴 목을 똬리 틀듯 둥글게 말고 마당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까만 깃털 안에서 번뜩이는 까만 눈동자가 단영을 올려다봤다....
고현진
  한 달 여를 아주 심하게 앓았다. 대학병원의 응급실로도 들어가고, 진통제를 먹어보고 주사를 맞아 봐도 가라앉지 않는 통증은 어디선가 보았던 그림 한 폭을 떠오르게 했다. 기억 속의 그림은 빨강과 검정의 소용돌이였다. 보고만 있어도 극도의 혼돈과 불안을 느끼게 하는, 내 몸이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이번 내 상황은 세탁기의 탈수 통 속에서 돌아가는 빨래 마냥 그 그림 속 휘돌이 속으로 온 몸이 아닌 머리만 빨려...
최원현
비가 내린다부슬부슬 가을비 내린다손끝마다 온통 붉은 물 들이며길 위에 홀로 서 있는가슴 위로 바람이 스친다종일 어깨를 적시는 빗방울하나 둘 떨어진 잎새는말없이 젖은 흙에 스며들고한숨처럼 가슴 두드리던바람은 발 아래 흩어지는데       비가 내린다토독 토독 떨어지는 빗소리마음에 자꾸 물이 드는 건인연이 깊어지는 것일 텐데단풍잎 소리 없이 지는 건깊어지던 우리 인연 다하여그대 떠나가는 것일 텐데우수수 이별의 시간...
강은소
메주가 뜰 때 2025.10.17 (금)
둥글게 사린 몸을삶고 찧고 매달아천형(天刑)의 조화(造化)에도해 달 맞기 몇 삭(朔)인가메말라벙근 틈새로고향(故鄕) 맛이 배어간다뒷손 없는 푸대접에너절하게 달아 말려겉으론 데데해도금이 간 깊이마다베옷의먹성(性)을 담는토속(土俗)냄새 익어간다
문현주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