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수영복 입은 일기

허정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11-01 09:37

허정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누군가 묻는다. 일기와 수필의 차이점은 무엇이냐고. 누군가 대답한다. 일기는 나만
간직하고, 나만 읽을 수 있어 화장기 없는 민 낯이거나 발가벗은 나체이어도 괜찮다. 하지만
수필은 남 앞에 서는 것이기에 나체의 일기에 수영복 정도 입혀 놓은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양수에서 맨몸으로 살다, 세상에 태어나 강 보에 싸이고, 배냇저고리에서
수의까지,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옷을 입는다. 내가 살면서 입었던 옷 중 제일 불편했던
것이 정장 차림이었다. 양복은 항상 나에게 그에 맞는 격식 치레를 요구하고, 나는 격식 있는
장소에서 입은 정장을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양복 안에 숨은
넥타이처럼 매달린 인맥 고리들, 그 고리로 채워진 공간에서 훑어 내는 사람들의 시선에
숨이 막혔다. 나는 장소에 어울리게 옷을 입어야 했고, 입은 옷이 주는 불편함을 참아야
했고, 입은 옷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여름만 되면 양복 없는 해변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자연을 닮은 자유로운 내가 있었다. 햇살이 펼쳐 놓은 유혹의 도시 위로 수많은 옷
속에 갇혀 있던 내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밴쿠버의 여름은 짧고 강렬하다. 일 년 내내 비 오는 날이 많고, 구름 끼고 흐린 날씨
탓에 여름이 오면 햇볕에 홀린 듯 해변으로 향한다. 정해진 법칙처럼 해가 나면 해변을 찾는
것은 긴 우기를 견딘 나에게 보상처럼 주어진 한정판 햇볕의 짜릿한 매력 때문이다. 햇볕을
쏟아 부은 해변에는 바람도, 사람들도, 부서지는 파도도, 하나 되어 흥분된 여름을 만난다.
나도 여름을 만나기 위해 들뜬 마음을 비치백에 넣고 해변으로 향한다. 밴쿠버는
관광도시이다. 관광명소라 불리는 곳 중 하나로 누드 비치가 있다. 렉비치라고 불리는
이곳은 대학교 부근에 있으며, 양쪽으로 해안을 감싸 안은 숲이 병풍처럼 서 있고, 숲 사이로
움푹 들어간 비치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듯 고립되어 숨겨져 있다.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길에서 연결된 숲속으로 작은 길이 나 있고, 가파른 경사를 타고 내려가는 긴 계단이 해변과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내려갈 때는 들뜬 마음에 몰랐지만, 돌아올 땐 급경사의 계단을 몇
번씩 쉬어 가며 올라가야 했고, 해변에서 만난 모습들을 계단 위에 되돌려 놓고 돌아왔다.
누드 비치의 입구에는 ‘옷은 옵션’이라고 팻말에 쓰여 있지만, 뜨거운 햇볕과 자연이 주는
유혹에 벗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백사장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비밀처럼 진한 회색이고, 탁
트인 바다가 하늘과 만나 입 다문 수평선을 만들고, 자연의 모습으로 햇볕을 받아내는
사람들이 모래 위에 누워있다. 누워있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있다.
 
    앞모습이 적나라함이 부끄러워 엎드려 등만 햇볕에 내어준다. 따뜻함이 몸을 데우고
혈관을 타고 몸속 구석구석을 누빈다. 햇볕에 내어준 몸에서 독소처럼 묵은 상처가 빠져나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어 자유롭다. 흙과 내가 부둥켜안을 수 있고, 맨몸으로 내 몸을 받쳐주는
흙이 미안하고 고맙다.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와 발자국이 밀려온다.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흰 양말에 구두를 신고 무리를 지어 걸어오고 있다.
언뜻 보아 그들은 관광객으로, 시끄럽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뱉어내며, 선글라스 밑에
감춰진 눈으로 해변을 훑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 영화에 나오는 총잡이들이 무리
지어 말을 타고 모래바람 속으로 달려오는 장면처럼, 해변에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그들의 발자국이 나를 덮칠 것 같아 나는 눈을 감는다. 뙤약볕 아래 걸쳐 입은 검은
양복이 그들의 치부를 온전히 가릴 수 없는지, 한여름에 흰 양말과 구두까지 챙겨 신고
해변을 샅샅이 구경한다. 찌푸린 내 눈길이 그들을 따라 움직이고, 햇빛이 들춰낸 그들의
속살이 양복 밑에서 꿈틀거린다.
   엎드린 몸을 뒤집어 햇볕에 나를 온전히 내준다. 검은 양복을 향한 나의 반항이 몸속에서
튀어나오고, 뒤집어진 내 몸을 그들은 신기한 듯 흘기고 간다. 나는 누드 비치에 있다는 명분
하나로 온몸으로 검은 양복을 경멸할 수 있어 통쾌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언어가
오히려 다행이고, 맨몸으로 저항하는 내가 갑옷 입은 장수보다 용감하다.
   무리가 지나가고 다시 조용해진 해변에 햇볕에 그을린 바람이 불고, 모래 위를 뒹구는
나와 자유가 있다. 순간마다 덧대어 입었던 옷들이, 수치심이, 바람과 함께 날아간다. 햇볕
앞에서 당당해지고자 벗어 던진 옷가지 수와 무게만큼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나의 삶이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가끔 나의 속살을 드러내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어느 날 진솔한 나와의 마주침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수영복 입은 일기가 수필이란 이름으로 남 앞에 서도 괜찮을까?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밥상 2026.06.04 (목)
접시와 접시 사이숲과 들과 물이 겹쳐 있다짐승의 흔적을 쫓던 발자국,갈라진 손바닥이 물을 더듬던 자리—그 숨결이 아직 식지 않는다접시 위에 놓인 것마다멀고 거친 길을 건너왔다이빨에 물리던 순간들,살아남기 위해 삼켜야 했던 밤들이얇은 김처럼 다시 오른다서로 마주 앉아웃음과 음식을 섞을 수 있기까지불가에 모여 앉던 목소리들이입 안에서 천천히 풀린다수저를 들어 올리면길을 잃을 듯 펼쳐진 이 자리—오랜 시간을 건너온 손끝이오늘의...
송무석
이사 온 아파트 1층에 요가 센터가 들어섰다.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습한 열기와 함께 땀에 젖은 사람들이 요가 매트를 어깨에 메고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낯설었으나, 불그스레 달아오른 얼굴들이 거리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문안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들의 표정에는 몸속의 묵은 것을 털어내고 나온 사람들만의 가벼움이 있었다. 땀방울은 단순히 운동의 흔적이라기보다 무엇인가를 비워낸 정화의 표식처럼 보였다. 호기심은...
허정희
유월 아침 2026.06.04 (목)
강을 따라도심으로 온갈매기날개 펄럭일 때마다뚝뚝바다가 떨어지고성급히 일어나는파도 소리에꿈틀거리는 배냇짓굽은 척추 사이로푸른 물살 채우면서들어서는 여름
김귀희
요즈음 너무 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난다. 건강, 기술, 문화, 설교, 말씀, 유머, 생활, 음악 등에 관한 정보를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거의 매일 전달받고 산다. 한 페이지에 쓰인 내용을 메시지로 받아 읽고 보는 것은 그리 부담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영상으로 된 것들은 보기 전에 다운로드해야 하고, 또 보는 데도 시간이 들어가게 된다. 아름다운 풍경, 음악, 좋은 말씀, 유익한 정보가 들어 있는 동영상들도 많이 있다. 하루의 일상을 기분 좋고...
김현옥
무채색의 여인 2026.05.29 (금)
옷장 문을 열자, 색색의 스카프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꽃무늬부터 원색이 섞인 대담한 무늬가 대부분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색상이다. 스카프는 물론 옷조차도 무늬 없는 단색이나 어두운 계열만 즐겨 입었다. 매일 옷을 바꿔 입어도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늘 비슷한 색과 스타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일부러 연출하거나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미술 동아리에서 한 동료가 “오늘도 무채색의...
민정희
국수 먹는 날 2026.05.29 (금)
마을 사람들 모여 대 솥 걸고 삶아내는 국수 기뻐서 슬퍼서 지쳐서 맺은 깐부를 평생을 찾아다닌다 이 손 다음 손들이 밀어낸 칼국수 가마솥에 풍덩 담가 빨간 고추가 어른거리는 가을 하늘에 양념장을 한다 구름에 세월 가도 낯설은 이름 칼국수를 시장 골목 끝에서 찾는다 양철 대문에 쓴 이름 ‘칼국숫 집’ 큰 소리로 고향 친구를 부른다 식당 아주머니 항아리 앞치마에 하얀...
반현향
가야금 2026.05.28 (목)
불러야 할 곡이 있어그대 태어났는가 쪽 찐 머리 빗질하듯 줄 고르고떨쳐 앉은 무릎에 기대어현침에 오르내리는 바빠진 손길 들려줄 울음 있어그대 태어났는가 어깨 타고 줄 위에 흐르는 애달픔꺾이는 가락마다 뛰노는 가슴마지막 떨림마저 어느덧 잦아들고  울어야 할 슬픔이 남아 그대 태어났나속 울음 속 울음에 껍데기만 남아버린저어할 노래가 있어 몸으로 울 가얏고
김민관
죽음을 통한 회복 2026.05.28 (목)
                                                                         이명희/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서론-한동안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죽음에 눌려 있다가 이유리의 연작소설을 읽고 나니 뭉쳤던 근육이 풀렸다. 죽음은 산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긍해야 하나라는 책임이 따른다. 죽음의 의미는 경건이지만...
이명희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