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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13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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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8-14 12:35

정효봉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 아빠, 늦겠어요. 빨리빨리요.” 아들 마음은 벌써 아이스 하키 토너먼트 경기장에 가 있었다. 아들과 난 3박4일 일정으로 치러지는 아이스 하키 토너먼트에 참여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아내는 삶은 계란, 김밥,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과자를 준비해 주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호텔에 도착하니  미리 온 선수들과 학부모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배정된 방에 짐을 풀고 잠시 아들과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상대편 팀에 대해 연구하고 장단점을 분석해 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들은 축구와 아이스 하키를 좋아했고 모두 지역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운동을 잘했다. 특히 아이스 하키는 다른 도시에서 치러지는 토너먼트가 많아서 매번 아들과 함께 여행 삼아 외지에서 하는 경기에 꼭 참여했다. 평소에 난 아들에게 편하고 인자한 아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합할 때만은 아들에게 매우 엄하게 대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무서운 질책과 꾸중을 자주 쏟아붓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묵묵히 듣기만 했고, 항상 “아빠, 다음부터 더 잘할게요.”라고 대답했다. 난 그런 아들에게 “그래,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당당!"을 외쳤다. 우리 부자에게 있어 '당당!'은 '힘내서 잘 싸우고 이기자'는 의미로 통했다.
 
    첫날 경기를 무사히 잘 마치고 이틀째 되는 날, 저녁이 되자 아들이 기침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점점 더 기침이 심해졌다. 일단 물을 많이 마시게 했지만, 기침은 더 심해졌고 이마를 만져보니 열도 약간 있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아내에게 전화해 의견을 물었다. 아내는 “감기 걸린 것 같은데, 어떡하지…” 하면서, 기침약을 사서 먹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기에 일단 아내가 알려준 약을 구입해서 먹였다. 하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내 입은 바짝바짝 마르고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아들 역시 불안했는지 연신 아빠를 찾으며, “괜찮겠죠?” 를 반복했다. 결국 아들은 밤새 기침과 씨름했고, 나 또한 아들의 기침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음 졸이며 밤을 꼴딱 세웠다. 다음 날 아침 경기 시작 전, 아들에게 경기를 쉬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기어이 출전하겠다며 경기장에 나갔다. 선수들이 준비운동을 하는 동안 난 멀리서 아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들은 마이클 정, 등 번호13 번 선수이다. 마이클 본인이 13 번을 고른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13이라는 숫자는 북미주의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번호인데, 이 번호의 유니폼을 입고도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골랐다고 했다. 마이클 정 선수의 모습은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키를 처음 시작할 때 오래오래 쓰라고 하키용품을 모두 큰 것으로 사주었다. 특히 헬멧은 가장 큰 것으로 쓰고 있어서 멀리서도 머리가 제일 크게 보이는 선수가 아들이었다. 멋진 플레이를 하기 위해서는 선수에게 몸에 딱 맞는 장비가 필요한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큰 헬멧 보호망 사이로 보이는 아들의 눈망울은 언제나 초롱초롱했다. 난 항상 경기 중간중간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아들과 나만이 알 수 있는 수신호를 보내곤 하였다. 그런 나에게 아들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자신감을 표현했었다. 물론 '당당' 이라는 소리와 함께 내게 보내는 신호였다.
 
    잠시 후 심판의 휘슬과 함께 경기는 시작되었다. 매번 자신있어보이던 아들의 모습은 그날따라 기력이 없어보였고, 날렵하던 스케이트 실력은 어디 갔는지 아들의 다리는 엄청 무거워 보였다. 나 역시 평소와 달리 수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다만 손을 아래로 누르는 신호를 보내며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큰 헬멧 보호망 사이로 보이는 아들의 머리는 유난히 작고 힘이 없어보였다. 경기 중반 상대편 선수가 엄청난 스피드로 아들에게 몸을 부딪쳤다. 그 선수의 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혀 나가떨어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묵상했다. 잠시 후 눈을 떠 보니 쓰러졌던 아들이 일어나 자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 나는 경기에 집중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때 아들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고, 나 역시 주먹을 불끈 쥐면서 나지막이 "당당"을 중얼거렸다.
 
   경기 종료 10분을 남긴 시점에 우리 팀이 2 대 0 으로 지고 있었다. 학부모들은 우리팀 선수들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팀의 화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패스되어 툭 떨어진 볼을 아들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순간 잽싸게 스틱으로 낚아채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움켜쥐고," 마이클, 마이클, 이때다, 달려 달려…"  아들은 순식간에 달려가 골키퍼와  1대 1 상황에서 골키퍼 가랑이 사이로 소중한 첫 골을 넣었다. 우리 팀 학부모들의 "13번 마이클!"을 연신 외쳐대는 함성은 아이스링크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황금같은 골을 얻은 마이클은 당당한 자신감을 되찾았고, 그 여세를 몰아 경기 종료 5분이 남은 상황에서 아들은 연달아 두 골을 더 넣어버렸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난 한동안 멍하니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넋이 나갔었다. 결국 우리 팀이 3 대 2 로 승리했다. 모든 선수들이 아이스 링크로 뛰어 들어가 "마이클!  마이클!” 을 연호했다. 동료 선수들이 모두 잘했다는 의미로 마이클의 어깨를 툭툭 부딪치면서 서로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흥분된 선수들 사이 좁은 공간을 통해 보이는 아들을 바라보는 두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들이 뛰어오면서 “아빠!”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손을 올려 내 눈물을 닦으면서 얘기했다. “아빠, 처진 모습 싫어요. 아빠는 항상 힘이 세고 당당해야 해요. 당당! ” 하면서 작은 주먹을 쥐어보였다. 3 박 4 일 아이스 하키 토너먼트의 주인공 최우수 선수상은 마이클 정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경기를 마친 후 늘 아들에게 늘 해왔던 나의 질책과 잔소리가 없어졌고 대신 즐겁고 행복한 덕담으로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아들은 대학 졸업 후 다국적 기업 한국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운동을 유달리 좋아하는 아들은 지금도 아이스 하키를 하고 싶지만, 여건상 그럴 수 없어 대신 축구를 즐기고 있다. 여전히 그때의 등 번호 13 번, 마이클 정으로, 축구클럽에서 오른쪽 공격수를 맡고 있다. 아들이 그리울 때면 난 그때 하키경기의 기적을 떠올리곤 한다. 올 가을 캐나다에  잠시 휴가차 온다는 연락이 왔다. 아내와 나는 먼지 묻은 하키 장비를 꺼냈다. 유달리 큰 헬멧도 깨끗이 닦고, 스케이트 날도 반짝거리게 갈아놨다. 13 번 유니폼 역시 아들 방문에 걸어놓았다. 아들이 오면 다만 며칠이라도 아이스 하키를 즐기며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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