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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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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1-10-04 09:30

식 /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집 뒤꼍 축대 돌담의 돌 틈 사이로 돌나물들이 수줍은 듯 뾰족이 손을 내밀고, 흐드러지게 핀 앵두꽃 주위에 분주한 벌 나비들과 함께 내 고향의 봄은 시작됩니다. 동네 앞 사방 십 리가 넘는 넓은 들판은 보랏빛 자운영 들판과 둑새풀 초록빛 들판으로 마치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강남 제비 돌아와 처마 밑 둥지 짓기에 분주하고, 하늘 높이 종달새 노랫소리는 나른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넓은 들판을 채웁니다. 벼 못자리에 보리타작과 이어서 모심기로 마을 어른들은 고사리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바빠집니다. 서둘러 품앗이나 놉을 얻어 콩 볶듯 애면글면 모내기를 끝내고 나면 마을은 다시 평정을 되찾고 동네 앞 논 둑방에 환하게 만발한 아카시아꽃이 싱그런 봄바람에 실려 상큼하고 향기로운 아카시아 꽃내음이 동네 안까지 가득했습니다. 나른한 봄날 동네 뒷산 골짜기에서 뻐꾸기가 그칠 줄 모르고 극성스럽게 울어대는 날이면 어른들은 봄 가뭄 걱정에 긴 한숨을 내쉬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7월 중순쯤이면 찾아오는 장마로 강이 범람하여 동네 앞까지 시뻘건 흙탕물이 십 리 길 전답들을 깡그리 뒤덮고 동네를 집어삼킬 듯 밀려오면 어린 나는 간이 콩알만 해져서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버드나무 잎과 미루나무 잎새들마저 파김치처럼 축 늘어지는 불가마 속 같은 삼복더위에 베잠방이 차림의 마을 노인들과 벌거숭이 어린아이들은 동네 초입에 늘어선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혔습니다. 어른들은 가뭄 걱정, 물난리 걱정, 벼 병충해 걱정을 하며 담뱃대를 다시 채우고 불을 붙여 온갖 걱정 근심을 함께 태웠습니다. 먹구름 몰려들어 서둘러 비설거지 끝내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장대 같은 소낙비 시원하게 쏟아지고 도랑물 골 지어 마른 논 물꼬 안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가 거북 등처럼 갈라진 논배미에 물이 가득 차면 가뭄 때문에 애태우던 어른들의 얼굴에도 활짝 주름이 펴지고 생기가 돕니다. 마당 가 울타리 밑 보리타작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쓰고 있던 해바라기 접시꽃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도 빗물에 말끔히 씻기어 산뜻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습니다.

 

삼복더위도 입추 처서가 지나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선들바람과 함께 가을은 성큼 찾아옵니다. 따가운 가을 햇살에 잘 익은 벼들은 황금빛으로 넓은 들판을 뒤덮고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이 원색으로 잘 조화되어 고향 마을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여름내 더위와 힘든 농사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농부들은 잃었던 생기를 되찾습니다. 농부들은 날마다 들에 나가 가을걷이에 여념이 없고 마을 안에는 이집 저집 탈곡기 소리만 요란합니다. 추수가 모두 끝이 나면 또다시 고향 마을은 고요와 침묵으로 조용하기만 합니다.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앉아 졸다가 불어온 바람에 화들짝 놀라 훌쩍 날아가 버리고 나면 모든 사물이 다시 정지 상태로 돌아가 버리고 엷어진 가을 햇살만이 혼자 남아 빈집을 지킵니다. 처마 밑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한여름을 바빴던 강남 제비도 고향 찾아 떠나고 나면 마을 초입의 느티나무들도 한 잎 두 잎 낙엽을 떨구며 겨울 맞을 채비를 합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김장과 초가지붕을 새 이엉으로 잇는 일까지 마무리 지면 비록 부자가 되기는 턱없이 부족해도 고향 사람들은 여유롭고 넉넉한 표정입니다. 새로 지붕을 이은 사십여 가호가 이마를 맞대고 초록빛 뒷산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둘러 앉아있는 마을을 멀리서 바라보면 평화롭고 정겨운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동지섣달 노루 꼬리만 한 짧은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을 무렵 굴뚝마다 저녁 짓는 연기 소롯이 피어오르며 알싸한 청솔가지 타는 냄새가 마을 전체로 퍼지고 실낱같은 초승달이 서산에 걸리면 고향 마을은 긴 겨울밤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저녁 설거지 끝나기가 무섭게 어머니들은 가물거리는 등잔불 아래 밤 이슥하도록 헌 양말 깁기나 뭉쳐진 솜이불 새로 넣느라 바쁘고 사랑채에서는 동네 어른들이 모여 객담을 나누며 새끼 꼬기와 멍석이나 가마니를 짜기도 하고 때로는 시조나 창으로 흥을 돋우었습니다. 동네의 과년한 처녀들은 한집에 모여서 혼수로 쓸 베갯잇이나 상보를 수놓으며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돌담을 넘었습니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깊은 겨울밤, 뉘 집인지는 모르지만 청아한 다듬이질 소리가 참으로 정겹게 들렸습니다.

 

  우리 조상님 6대가 대대로 살아오셨고 또 내가 삼신할머니의 점지를 받아 태어나 열 한 살까지 살았던 농가 사십여 가구의 가난한 시골 마을이 내 고향의 전부입니다. 고향 마을에서 버스나 택시는 아예 구경조차 할 수도 없었고 다만 꿈에 떡 먹듯 커다란 화물 트럭이 고향 마을 앞을 지나 고개 넘어 면사무소에 덜컹거리며 불쑥 나타나 시커먼 연기만 토해놓고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훌쩍 사라지는 오지 중의 오지였습니다. 여타 다른 시골 마을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고택이나 사당 하나도 없었고 두 눈을 부라리며 우뚝 선체 마을을 지키는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도 볼 수 없습니다. 직선거리로는 삼십 리도 채 안 되는 대전을 한번 나들이하려면 동네 앞 강을 건너 십 리가 넘는 들판을 걸어 시꺼먼 연기를 먹구름처럼 뿜으며 천지가 진동하듯 굉음을 토하는 완행열차를 타야만 했었습니다. 이렇게 고향마을은 물질문명이나 기계문명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고 고립된 조그만 시골 마을로 사십여 농가가 많으면 한 섬지기 적으면 두세 두락 되는 논배미나 밭뙈기를 그저 하늘만 바라보며 땅만 믿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감읍하며 큰 욕심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농투산이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몇몇 농가는 벌써 세안에 양식이 떨어져 장리쌀 빚내어 어찌어찌 연명하다가 서둘러 풋보리 잡아 찧고 말려 기나긴 봄날 간난신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고향마을 사람들은 착하고 순박하여 실정법의 시비가 필요 없을 만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정 많고 순박한 이웃들이었습니다. 마을에 혼사나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너 나 할것없이 내 집안 일처럼 서로 돕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 년에 한 두 번 마을을 찾아오는 엿장수나 뻥튀기 장수라도 오는 날이면 온 마을이 고요와 적막으로부터 생기를 찾아 술렁일 정도로 고향 마을은 늘 조용했습니다. 이렇게 보잘것없고 가난했던 시골 동네가 나에게는 왜 그리 애착이 가며 그리운지 모를 일입니다. 절경이 아니면 어떻고 명소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저 고향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정답고 포근하며 애절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열한 살 때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에 옮겨살면서도 호적을 한 번도 옮기지 않고 고향 면사무소에 그대로 둔 이유도, 다소 불편했지만, 호적을 핑계로 고향에 한 번 더 발걸음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은 잡목으로 우거진 마을 뒷산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고개를 잔뜩 뒤로 꺾어야 끝이 보이는 고층 아파트와 위풍당당한 빌딩 군락의 위압에 숨죽이며 뒷산 자락 구석 한편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앉은 우리 가문의 납골당엔 불어오는 소슬바람에 낙엽조차 파르르 떨며 갈길 몰라 흩날리고, 그 옛날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던 동네 단골 상여 요랑 잽이 강 서방의 구슬픈 회심곡이 처량한 요랑 소리와 함께 환청으로 어둑어둑 땅거미 속으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매캐한 모깃불 옆 평상에 누우면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들과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 정다웠고, 구불구불 정겨운 논두렁길 밭고랑 길 따라 동네에 들어서면 야트막한 돌담 호박 넝쿨 너머 초가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가 곱던 고향마을의 정경은 청아하게 들리던 다듬이질 소리와 순박했던 이웃들과 함께 오직 머릿속에 잔상으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늘어나는 회기 본능에다 잔잔한 잔상으로만 남아있는 고향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 애틋하고 더 그리운 고향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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