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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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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0-10-21 08:46

신순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아이참, 자꾸 누구지?”
엄마는 현관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요 며칠 전부터 계속 누가 사과, 도토리, 솔방울 같은
것들을 현관 앞 화분 구석에 얌전히 놓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짖궂은 동네 아이가
장난하나 생각했는데 몇 번 되풀이되니까 누군가 나쁜 짓을 하려고 우리집을 표시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도 되었습니다. 밖에 급히 나가느라 치우지 못하고 그냥 두었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보니
깨끗이 사라진 것을 보았을 때 그 의심은 더했습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오늘은 내가 꼭 범인을 잡아야 겠어.”
엄마는 단단히 벼르면서 현관 앞을 치웠습니다.
“엄마, 내가 지킬 게.”

방울이는 현관 옆 놀이방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고 말했습니다. 놀이방에는 길가로 난 큰 창문이
있어 밖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딱 좋았습니다. 하지만 점심을 다 먹도록 집으로 다가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은 안 오는가 보다 하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이게 왠일일까요? 화분 옆에 배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 언제 왔다 갔지?”
방울이는 꼭 범인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와서 그림책을 보며 현관 앞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 사이 엄마도 앞마당에 딩굴고 있는 낙엽을 긁어모으고 있었습니다. 배도 부르고 맑은
가을 햇살 아래 책을 읽자니 슬슬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그때 누가 방울이를 부르는 소리에
방울이는 번쩍 고개를 들었습니다. 엄마는 아니고 둘러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청설모 한 마리가
방울이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방울아.”
“으악. 청설모가 말을 하네.”
“너는 위험한 사람이니?”
“아니? 나는 그냥 유치원에 다니는 다섯 살 어린이야.”
“음. 그럼 나를 물거나 할퀴지 않을 거지?”
“유치원에서 친구가 나를 물었던 적은 있지만 나는 물지 않았어. 울지도 않았어.”
“그래, 내 배를 가져가도 되겠어?”
“너였어? 화분 옆에 사과나 솔방울을 둔 범인이?”
청설모는 살그머니 방울이 옆으로 와서는 일단 배를 입에 물고 조금 더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배를 한입 베어 물고는 내려 놓더니 우물거리며 말했습니다.
“아, 정말 배는 달고 시원하다니까. 내 친구가 가져다 놓은 거야. 나도 맛있는 것을 모으면 여기다
갖다 놓고 나눠 먹어. “
“사이가 좋구나. 그런데 여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인데 왜 여기다 놓아? ”
“친구가 찾기 편하라고 그랬는데… 여기 말고도 뒷마당 담장 구석이랑, 잔디 가운데, 저쪽
나무아래에 묻어 놔. 먹을 것이 없는 겨울에 찾아서 먹으려구”
“아, 저축하는 거구나?”
“그래야 겨울에 굶지 않고 살수 있지.”
“넌 참 똑똑하네.”
“그런데 자꾸 잊어버려. 어디다 숨겨놓았는지. “

“아! 지난 봄에 잔디 한가운데에 도토리 싹이 여러 개 나서 내가 뽑았는데 그게 네가 숨겨둔
도토리였구나?”
“그래? 헤헤 미안 미안. “
“그런데 벌써 겨울 준비를 해? 아직 눈이 오려면 한참 멀었잖아.”
“이미 눈이 내린 다음에 먹을 것을 찾으면 늦어. 다른 동물들이 먼저 다 가져갔거나 더 이상
열매들이 남아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겨울이 되면 너무 춥고 눈으로 덥힌 세상은 완전히 달라
보여서 먹이를 찾으러 다니기 힘들어.”
그때 옆집 아주머니가 고양이 루시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루시는 청설모를
보자 마자 니야옹 하면서 아주머니 품에서 나와 번개같이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꺄악, 안녕. 난 고양이가 정말 싫어.”
청설모도 비명을 지르며 쏜살같이 도망갔습니다. 먹다 남긴 배가 방울이 발 옆에 떨어져 있었을 뿐
사방은 조용했고 엄마는 여전히 낙엽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엄마, 루시 어디 갔어?”
“옆집 안에 있던지 뒷마당에 있겠지. 왜?”
방울이는 후다닥 뒷마당에 나가서 담장 틈으로 옆집을 훔쳐보니, 목줄에 매달린 루시가 어슬렁
어슬렁 걸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옆집 아주머니가 외출할 때면 루시를 뒷마당에 내어놓고 목줄을
걸어주곤 합니다. 방울이는 이상하다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포도나무 밑을 보니 흙이 파헤쳐진
흔적이 있었습니다. 방울이는 모종삽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파보니 그 안에 도토리와 잘 모르는
씨앗들이 있었습니다. 청설모가 얘기해준 저장창고 중 하나가 분명했습니다.
다시 앞마당으로 나와서 현관 앞으로 가보니 아까 청설모가 한입 베어 물었던 배가 없어졌습니다.
“엄마, 여기 배 치웠어?”
“아니? 배가 없어졌어? 아무도 안 왔는데.”
그때, 다시 방울이를 누가 불렀습니다. 둘러보니 저쪽 길 건너 배를 입에 물고 있는 청설모가 잠시
방울이를 쳐다보더니 그대로 바람같이 사라졌습니다.
“엄마, 여기 누가 사과 랑 솔방울 갖다 놓는지 알았어.”
“누구야? 어떻게 알았어?”
“청설모야. 청설모는 겨울에 먹으려고 먹이를 여기저기에 저장한대. 그런데 자주 어디에
모아두었는지 기억을 못한데. 그래서 우리가 저번 봄에 잔디에서 자란 도토리 나무 같은게
있는거래.”
“그렇구나. 그런데 그런 걸 누가 가르쳐주던?”

“그게… “
청설모랑 이야기를 했다면 엄마가 믿지 못하실텐데… 하다가 방울이는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그림책을 보았습니다. 도토리를 물고 있는 청설모 그림이 있는 표지에 ‘겨울을 준비하는 청설모’
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림책에서.”
“아이구, 우리 방울이가 책에서 배웠구나. 엄마도 청설모처럼 겨울준비를 해야겠네. 슬슬 김장할
때가 다가오는구나.”
“엄마, 눈이 오기전에 김장해야죠. 눈이 오면 춥고 힘들잖아.”
“어머, 얘가 갑자기 어른스럽게 말을 하니? 호호 그러자. 너무 추워지기 전에 김장하자.”
방울이는 엄마를 도와 쌓아 놓은 낙엽을 쓰레기 봉투에 담았습니다. 옆 길에서는 또 어디선가
나타난 청설모 한 마리가 솔방울을 물고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한 번 불자
나무들은 나뭇잎을 한줌씩 또 다시 뱉아내었습니다. 가을이 여기저기서 바쁘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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