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쓰레기 치우는 아버지

정숙인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04-17 15:23

정숙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너무 오랜만이라 짧고 어색한 통화를 끝내며 아버지의 목소리가 많이 쇠잔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과 달리 아버지의 날이 따로 있어 온전히 하루라도 아버지를 생각하며 국제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바쁘기 그지없는 이민자의 삶 중에서 다행이라면 참으로 다행이었다. 마음 같아선 찾아 뵙고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대접하련만 그리 할 수 없는 현실의 장벽에 가슴 한 켠으로 한숨만 새어 나왔다. 아버지와의 통화 끝에 옛날 생각에 멍해 있는데 열어놓은 뒷문을 뚫고 강한 마찰음이 넘어왔다. 고운 햇살 아래로 저만치 더러운 물줄기를 흘리며 쓰레기차가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오래 전에 잊혀졌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커다란 쓰레기통 옆에서 등교하던 우리들을 바라보던, 올망졸망한 쓰레기 봉지를 가득 들고 해를 등지고 선 겨울 나무 같던 아버지를.
 
아버지는 임상병리사로 출근하던 병원을 갑자기 그만두고 집에서 빈 시간들을 보냈다. 오 남매가 등교하느라 소란스런 아침에도 느긋하게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거나 이미 보았던 신문들을 뒤적이며 상머리에 앉아 소소한 말참견을 하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타박을 서슴지 않았다. 가장의 대책 없는 무책임에 어머니는 하루 아침에 험한 세상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어머니 말대로 무조건 일하기 싫어 무위도식을 하는 것인지 아버지 말대로 정말로 몸이 아픈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나는 아침마다 만나는 골목 친구들에게 더 이상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의기양양하게 등교하는 그들을 보며 말할 수 없는 초라함을 느꼈다. 우리와 함께 번듯하게 출근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이따금 그런 아버지가 부러울 때가 있었다. 숙제를 마저 끝내지 못하고 벌받을 각오로 학교에 가는 날이나 찬바람이 불고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날에 뜨뜻한 아랫목을 차지한 아버지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가여운 왕이었고 어머니의 말마따나 하늘나라 신선이고 손님이었다. 아버지는 그저 몸 전체가 아프다고 호소하였다.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꾀병을 앓는 것이라 했고 이에 오기가 난 아버지는 계속 아프다고 우기며 한사코 일을 나가질 않았다. 두 사람이 대립을 하든 말든 오 남매는 호랑이 같은 어머니가 집에 있지 않아서 무조건 좋았다. 평소 어머니는 학교가 끝난 후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학습지와 숙제를 모두 끝마치고 나서 놀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던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곧장 문방구로 달려가 뽑기를 하며 불량식품들로 허기를 채우고 동네 친구들이 하나, 둘 집으로 불려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을 새까매진 얼굴로 밤늦도록 놀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거리를 물어 나르느라 늦은 밥이 되어야 귀가를 했고 아버지는 나름대로 자유를 만끽하며 동네에 위치한 기원으로 날마다 출근을 하고 자정 무렵쯤에야 슬그머니 귀가를 하곤 했다. 
 
그 날 아침도 예외 없이 나는 학교에 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아버지가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들어서며 방에 쓰레기가 있냐고 물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출현에 나는 반사적으로 한쪽에 놓인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집 안 공기가 평소와 달랐다. 응당 잠자리에 있어야 할 아버지가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물론 그 일은 처음부터 아버지가 자청해서 이루어진 일이 결코 아니었다. 아무 일도 안하고 노느니 집안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시작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각 방에서 쓰레기를 수거하였다. 점호 받는 군인처럼 매일같이 정해진 구역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던 우리는 아버지의 등장으로 쓰레기통에는 아예 손도 대질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몹시도 송구스러움을 느껴 그런 아버지를 도와 쓰레기를 비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쓰레기 비우는 일은 당연한 아버지의 몫이라 생각하였고 더 이상 도우려 들지 않았다. 
 
겨울 방학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동네 골목을 빠져 나가던 나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버지였다. 무릎이 튀어나온 빛 바랜 추리닝을 입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에 철 지난 헌 슬리퍼를 신은 아버지가 시멘트로 만든 커다란 쓰레기통 옆에서 등교하는 오 남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양손엔 올망졸망한 쓰레기 봉지들이 들려있었고 등 뒤로 짧은 겨울 해가 온 누리를 비추고 있었다. 초라한 행색의 아버지를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무언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뜨겁게 용솟음치며 울컥함에 목이 메었다. 환하고 눈부신 햇살은 남루하고 보잘것없는 아버지를 가감 없이 비추었고 평소 말없는 모습 그대로 아버지는 커다란 쓰레기통 옆에서 목숨이 다한 겨울 나무처럼 앙상히 등교하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다. 잎은 모두 떨어지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헐벗은 겨울 나무, 그 누구 하나 관심조차 갖지 않는 철 지난 들판에 외로이 서있는 허수아비처럼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정말로 아파 보였다. 아프다는 아버지를 모두들 믿어주지 않아서인지 더없이 병들어 보였다. 무척이나 내성적이었던 나는 아무런 힘없이 서있는 아버지를 향해 갑자기 돌아섰다. 그리고는 한 손을 번쩍 들어올려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왁자지껄 떠들며 멀어져 가는 형제들을 보며 불현듯 나만이라도 아버지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딸의 벅찬 응원에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며 마른 장작에 불길이 번지듯 삽시간에 귀밑까지 찢어지는 하얀 웃음을 부메랑으로 내게 보내왔다. 
 
초여름의 곱디 고운 햇살 한 줄기는 아버지가 만들었던 환하고 커다란 미소와 교차되어 추억으로 시린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 햇살은 어린 날, 아버지와 함께 등교하며 거닐던 옛 골목길을 비추고 상처받은 마음이 토해내는 아픈 아버지를 오롯이 믿고 응원하는 딸과 함께 했었다. 옛날 생각에 멍해있던 나는 그 햇살을 바라보다 말고 허공에 대고 불끈 주먹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하늘 저 건너편을 향하여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쉬이 만나지 못하더라도 맑고 투명한 햇살 한 줄기에 아버지를 향한 힘찬 응원의 메시지를 이렇게나마 실어 보낸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아침 이슬이여, 너는 어둠의 울타리에 걸어 놓은  내밀(內密)의 창(窓) 지순한 그리움의 초상이구나    춥고 습한 긴밤들을 눈물로 견디며 모든 고통의 순간들은 결국 숭고한 환희로 통하는 길이라는 지혜를 터득한 너의 맑은 이마여!                                           ...
안봉자
작은 아씨 2025.06.27 (금)
  어머니는 젖이 풍부하신 분이셨다. 우리 형제들을 키우면서도 일부러 젖을 떼려고 애쓰지 않고 아이가 먹겠다면 언제까지고 먹이려고 하셨다. 나도 거의 세 네 살까지 젖을 먹었다고 들었다. 내 밑에 막내 동생은 여섯 살이 넘도록 젖을 먹었다.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가도 들어와서는 어머니 품을 파고들어 젖을 먹었다. 주위 사람들이 젖을 떼지 다 큰 애를 무슨 젖을 먹이냐고 하면 어머니는 이제 더 먹일 아이도 없는데 나오는 젖을, 먹겠다는...
심현섭
그리움 2025.06.27 (금)
사그라져 가는 물안개 아침 햇살에 부서지고   파도가 뿜어낸 당신 닮은 은빛 숨결 물 비늘이 허공 위로 흩어지네   그대 향한 서성임이 아픔의 태산 되어 울고   요란한 살여울 지쳐 밀려온 그 자리 차디찬 빙산 이어라   볕 뉘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한 당신 목소리에 오늘도 목이 메이네
김정임
바람이 전해준 말 2025.06.27 (금)
  캐나다 웨이에서 오클랜드 스트리트로 우회전 핸들을 틀자마자, 눈부신 초록의 나라가 시야에 확 펼쳐졌다. 눈이 맑아지고 머리가 시원해진다.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로 시작되는 설국(雪國)의 첫 페이지가 떠올랐다. 하얀 눈의 나라로 들어가는 대신, 나는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든 별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길은 조금 지나면, 디어 레이크 파크 숲을 우측으로 끼고 돌면서 계속...
지연옥
The Rose of Sharon Blooms in Vancouver                                                   Poem by Lotus Chung Mother, brother, we’ve crossed the seaUnder Vancouver’s sky, the Rose of Sharon blooms in fullOn sunny days, let bursts of laughter bloomLet’s dress in hanbok and dance with grace In the immigrant’s suitcase, dreams and hopesAnd tucked inside, a single word in our mother tongueChildren, friends, be proud Embracing two cultures in our...
로터스 정병연
양상군자 시리즈 2025.06.20 (금)
30년 전 빅토리아에서 편의점을 운영할 때였다. 한 번은 내 가게에서 일하는 모하메드 (아프가니스탄인)가 어떤 아이가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고 혼내 주었다고 한다. 그 아이 인상착의를 들으니 가끔 엄마 심부름으로 담배나 우유를 사러 오는 테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잔돈 남은 것으로 사탕을 사 먹는 순해 보이는 4-5학년쯤 되는 남자아이였다. 며칠 뒤 저녁때쯤 그 아이와 친구가 사탕을 사러 들어왔다. 검은 큰 잠바를 입고 사탕과 초콜릿이 진열된...
이종구
   거센 물살을 이기며 본향으로 역류하는 연어의 몸짓을 본 적이 있는가? 영어의 바다에서 한글로 문학작품을 쓰는 이들이 연어의 몸짓을 닮고 있다. 금년 한카문학상 응모작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캐나다에서 오래 살다 보면 언젠가부터 영어도 잘 늘지 않고, 한글은 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말을 살리고, 우리 글을 익히려는 한국문학 지망생들의 도전은 처연하게 아름답다. 이제 수상자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원배(심사위원장)
은사시나무 2025.06.13 (금)
유월의 숲나풀거리던 녹두 빛은  어느새 농록한 푸름으로 가득하다해질녘 노을 꽃피면붉은 비로도 옷 두른 나무들 사이늙은 은사시나무흰 버짐 가득 핀 맨살 드러낸 체 고단한 시간의 허물을 벗겨내고 있다영겁의 세월 지나는 동안이웃한 바람, 꽃, 새들에게힘껏 다정하였다고 정성다해 사랑하였다고구름으로 하늘편지를 띄운다고요한 유월의 숲겹겹이 까만 커튼이 드리우면슴벅거리는 황혼의 노을 데리고은사시나무 레테의 강가*에...
김계옥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   
광고문의
ad@vanchosun.com
Tel. 604-877-1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