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전화하는 사람은 어머님이시다. 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음성이 전선을 타고 건너온다.
"눈이 많이 오고 있다. 꼼짝하지 말고 집에 있거라." 하신다.
“예”하고 대답했는데, 이때 70넘은 아들은 초등학생이 된다.
어머니는 지금 양로원에 가 계신다.
집에 계실 때, 어머님 방은 2층에 있었다. 물 한 잔을 들고 오를 힘이 없어 컵을 계단 한 단 한 단에 올려놓으시며 기어 올라가기도 하셨다. 그 모습을 뵙는 게 가슴 아프고, 아래층에 방을 만들 형편도 안 되어 죄송하고 퍽 난감했다.
또 우리 내외가 외출할 일이 있으면 문을 잠가야 할지 그냥 열어둔 채 가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열어두고 가면 귀가 어두워 누가 들어와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혹 도둑이 힘없는 노인네를 밀친다면 꼼짝없이 당해야 할 판이다. 만약 대문을 잠그고 나간다면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 구조대가 문을 부수어야 될 일이었다.
그러던 중 어머님이 양로원으로 가시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아메니다 양로원에 친구분들이 같이 지내자고 하는 것이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는 듯했다. 혼자 계시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어지럼증 때문에 쓰러져 목숨을 잃게 되면 맏아들을 불효자로 만들고 만다는 염려 때문인 거다.

<▲ 박병준씨(오른쪽)과 그의 어머니.>
일본에서 공부한 신여성이 두매 산골 삼대독자와 혼인하여 맏아들을 낳으셨다. 일제의 압박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구하라는 의미로 아명을 ‘모세’라고 부르며 나에게 온갖 기대를 걸고 한세상을 살아오신 어머님이시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한 세기의 삶이 그 막바지에 이르러 자신의 죽음보다 아들의 안위를 더 걱정하신다. 그 마지막 소원이 이렇게 단순하고 간절해지는 시점에 이르렀다.
양로원 얘기가 나왔을 때 가장 반대를 한 것은 아내였다. 아흔이 넘은 어머님의 여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낯선 곳에 보내느냐, 어머님 떠나시는 날까지 모시겠다는 아내의 고집을 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리가 집을 비우는 동안 라면이나 아니면 찬밥을 물에 말아 대충 끼니를 때우기 일쑤이신데 그곳에 가시면 일단 하루 세 끼니 식사를 제대로 드실 수 있으니 그게 효도가 아니겠느냐, 동생들과 조카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를 하였으니 그만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설득을 했다.
어머님과 같이 양로원 답사를 하고 돌아온 후 아내가 고집을 꺾었다. 옛날 같으면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아랫목에 않아 상노인 대접을 받을 70넘은 아내가 90넘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늘 웃는 얼굴로 살아온 지난 세월이 새삼스러워 진다.
어머님을 양로원에 보낸다고 생각하니 우리 세 식구가 오손도손 마주 앉아 마시던 커피 시간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이 제일 아쉬웠다. 그리고 뒤뜰 농사는 어찌하나. 씨 뿌리는 시기와 씨앗관리는 늘 어머님이 해 오시던 일이었는데...
텅 빈 어머님 방은 그 다정하던 음성과 낮잠 주무시던 모습이 남아 .있는 듯 나도 모르게 들여다보게 된다.
오늘도 어머님 안 계신 빈자리에 칠순 아들이 서성인다.

<▲ 박병준씨(오른쪽)과 그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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