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정치인을 중심으로 퍼진 신세계그룹 불매 운동 포스터(왼쪽)와 이에 맞선 2030세대 중심의 신세계 바이콧(구매 운동) 포스터(오른쪽). / 정용진 인스타그램, FM코리아
여당 정치인을 중심으로 퍼진 신세계그룹 불매 운동 포스터(왼쪽)와 이에 맞선 2030세대 중심의 신세계 바이콧(구매 운동) 포스터(오른쪽). / 정용진 인스타그램, FM코리아


2022년판 반공(反共) 이데올로기 전쟁이 시작된 걸까.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소셜미디어에서 촉발된 ‘멸공(滅共)’ 논쟁이 정치권 갈등을 넘어 소비자들 간 신세계 제품 불매와 구매 운동 대결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정 부회장의 멸공 발언에 항의하는 뜻에서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신세계 제품 보이콧(boycott·불매운동)이 펼쳐지자, 이에 맞서 ‘신세계 물건을 구입하자’는 바이콧(buycott·특정 기업 제품 구매를 지지함) 운동까지 등장한 것이다. 바이콧을 주도하는 이들은 ‘1일 3스벅’(신세계가 운영하는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를 하루에 3번 이용), ‘오늘부터 쓱배송 시작(신세계 SSG닷컴 이용)’과 같은 문구를 공유하며 신세계 구매를 독려하고 있다. 신세계 보이콧이 주로 여권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퍼진 데 반해, 정 부회장의 멸공 발언을 옹호하고 신세계 제품 구입에 적극 나서는 바이콧 운동은 2030 청년층이 구심점이 돼 주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 사안을 두고 특정 기업에 대한 보이콧과 바이콧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며 “북한과 중국에 대한 반감이 강한 젊은 층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멸공 논란 2라운드’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보이콧 vs. 바이콧

‘멸공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11월 정 부회장이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정 부회장은 정치적 논란 속에서도 이달 초까지 멸공 관련 게시물을 올렸다. 후폭풍은 거셌다. 신세계 계열사 주가가 폭락하고, 여당 정치인들까지 불매운동에 가세했다. 부담을 느낀 정 부회장은 지난 10일 더 이상 멸공을 쓰지 않겠다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정 부회장의 멸공 절필 선언으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젊은 세대의 바이콧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지난 11일 2030세대가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FM코리아’에 한 회원이 “연평도 포격, 서해 교전 겪은 세대라면 멸공해야지”라는 글과 함께 신세계 제품 구매를 독려하는 포스터를 올리면서 바이콧 열기가 확산된 것이다. 이 포스터에는 ‘Yes, 바이콧 멸공, 갑니다. 삽니다’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NO, 보이콧 정용진,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고 적은 불매운동 포스터를 패러디한 것이다.

바이콧 운동이 확산하면서 멸공 발언 지지 열기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 12일 정 부회장은 인스타그램에 올린 케이크 촛불 사진 게시물에 멸공을 쓰지 않았는데 네티즌들이 ‘멸공의 횃불’ ‘멸공 화이팅’ 같은 댓글을 달며 자발적으로 멸공 이슈를 재생산하고 있다. 정 부회장 옹호 댓글을 단 20대 후반 팔로어는 “반공 이념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구태가 싫어 바이콧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일본보다 중국이 더 싫은 2030

2030이 유독 멸공 논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뭘까. 이동률 동덕여대 교수(중어중국학과)는 “코로나 이후 세계적으로 중국에 대한 반감이 확산하는 가운데 한국에서만 유독 젊은 세대에서 반중 정서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MZ세대는 현 정부가 일본에는 강경 대응하면서 북한과 중국에 저자세로 일관해왔다고 본다”며 “미세 먼지, 코로나 바이러스 등 중국 때문에 피해를 자주 겪으면서 반중 분위기가 고착화된 것”이라고 했다.

2030의 반중 기류는 최근 들어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해 한 시사 주간지가 한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8.1%가 “중국은 악(惡)에 가깝다”고 응답했다. ‘선(善)에 가깝다’고 한 응답자는 4.5%에 불과했다. 미 뉴욕타임스는 이 조사 결과를 인용, “한국의 젊은 세대가 과거 식민 지배를 했던 일본보다 중국을 더 싫어하고 있다”며 “이는 2022년 한국 대선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가 2020년 한국을 포함한 14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한국은 응답자의 75%가 ‘중국을 혐오한다’고 답했다.

한 대기업의 50대 임원은 “얼마 전 술자리에서 한 30대 직원이 ‘일본은 제가 한국인이라서 싫고 중국은 제가 사람이기 때문에 혐오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며 “생각보다 젊은 층의 반중 감정이 상당하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문화학과)는 “경제·정치적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대한 위기의식이 멸공 논란 같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반중 운동 형태로 촉발된 것”이라며 “삼국지 등 중국 역사를 통해 중국을 친밀하게 느낀 기성세대와 달리 MZ세대는 중국과 정치, 문화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온라인에서 20대 남성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혐오 콘텐츠에서 중국인들이 자주 거론되면서 반중 정서가 생긴 측면도 있다”며 “친일 프레임만큼이나 막연한 친중 프레임도 위험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