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어느새 봄기운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교감하고 있다. 눈 부신 햇살과 단비는 새순을 돋게 하고 온 산야를 누비던 바람은 초록 물결을 몰고 온다. ‘날마다 알을 품는 새로운 나’, 알을 생각으로 풀이한 사람이 있다. 마음에 어둠이 사라지고 새벽빛이 스며드는 순간을 경험한 그는, 몸에 생각이 머물러야 온전한 하루가 된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멈춘 가운데 흙을 고르는 20평 남짓의 텃밭은, 알을 품어 부화시키기 좋은 안온한 둥지다.
이 집에 들어서면 이렇게 편안하네
눈비 헤치고 돌아온 상처의 새
오늘도 둥지에 들어 편하게 날개 접네 (마종기 ‘둥지' )
늠름한 골든 이어스 산봉우리들이 멀리 보이고 새들이 바람을 가르는 콜로니 농장 텃밭에서, 나는 씨를 뿌린 후 흙을 가볍게 덮어 물을 준다. 놀랍게도 지난해 바람을 타고 텃밭 이곳저곳으로 날린 꽃씨들이 두터운 표층을 뚫고 나와 떡잎을 내밀고 있다. 한겨울 모진 추위를 견디고 땅의 습기와 양분을 받은 씨앗은, 이제 고개를 들어 호명의 차례를 기다린다. 활련화, 코스모스, 금잔화, 해바라기, 지치(Borage)..., 저마다 떡잎부터 다른 생김새들이다.
“뽑아 버리지...", 채소밭에 꽃이 자리 잡는 걸 못마땅해하는 남편은 꽃을 마치 더부살이하는 잡초쯤으로 냉대한다. 와사비 맛을 내는 주홍빛 활련화와 오이 맛의 보랏빛 지치는 샐러드의 격을 높이고, 알싸한 향으로 달팽이를 쫓는 노란 금잔화는 텃밭의 파수꾼이다. 해마다 깃털처럼 가벼운 꽃씨들은 땅속에서 화사한 빛을 길어 올려,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쑥갓, 근대, 비트 사이를 비집고 피는 지치꽃과 활련화는 벌들의 곳간이 되어 준다. 분주히 꽃 속을 드나드는 벌들은 호박과 오이의 꽃가루받이를 돕는 텃밭농사의 일등공신이다. 수많은 미생물과 지렁이들은 유기물질을 썩혀 땅의 생명력을 높이고, 수고한 대로 거두게 한다.
여위는 햇살을 등에 지고 머우, 미나리, 부추를 뜯을 때, ‘땅이 화수분이며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라는 농부들 말을 떠올린다. 꽃과 벌, 그리고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미생물들과 지렁이들의 공생 관계 속에 텃밭은 나날이 푸르러진다.
콜로니 농장 한쪽 창고 벽에는 선반들이 매달려 있다. 250여 명의 회원이 일주일에 한번 홈리스 식당에 기부하는 농작물을 모아두는 곳이다. 가을 수확기엔 회원들의 잉여 농작물을 모두 모아 기부하는 연중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회원들은 씨앗과 모종, 농사 정보와 수확한 농작물을 서로 나누며 연대감을 쌓아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이지 않으나 오묘한 질서 안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물망이다. 모든 존재는 선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는 가운데, 많은 이들의 땀 흘린 노고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많이 소유하기보다 풍성하게 존재할 수 있기를….’
퇴비를 얹은 흙을 뒤엎어 잘게 부수고, 씨를 뿌려 물을 주는 동안 ‘무념무상’의 순간과 마주한다. 언제나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텃밭에서의 하루는 편안하고 넉넉하다. 씨앗을 뿌려 작물을 키우는 지난한 과정이 수확의 기대치보다 의미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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