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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6시, 3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선 윙의 로스 카보스행 비행기는 밴쿠버 공항을 이륙하고 있었다. 표지판의 안전 밸트 사인이 꺼지자, 우울한 겨울 날씨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승객들에게 샴페인을 제공하겠다는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비행기 안은 곧 따뜻한 남쪽 나라로 향하는 휴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크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겨울 옷을 벗는 사람들,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는 연인들---. 정호승의 시집을 펴든 나는 “그대와...
조정
겨울 아침 골든 이어 산 순백의 봉우리가 여명의 햇살 속에 눈부시다. 푸른 대기 속에 고요하고 깊은 기상은 티벳의 카일라스가 되어 신비하게 다가온다. 하늘에 닿을듯한 네 개의 눈 덮인 봉우리들은 언제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산속 나무들이 깊이 뿌리 내리고 산새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그저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유리창 문을 통해 눈부신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일은 내 마음에 평화를 심는 시간이다. 이 겨울 ‘비움으로써 더...
조정
풍경 소리 2016.08.17 (수)
장례 예배를 마치고 고인께 명복을 빌던 짧은 시간, 그분은 창백한 밀랍의 얼굴빛과 초연한 표정으로 나는 이제 이 세상 사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타들어 가는 촛불처럼, 고통으로 무너져 내린 육신은 죽음의 다리를 건너 미지의 세계로 떠나갔다. 나는 생전의 고인을 기억하며 기도 드렸다. 병마의 고통과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절망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빛나는 날들을 기억하며 죽음의 여정에 오르시기를. 고인은...
조정
그해 겨울 2016.02.27 (토)
잿빛 밴쿠버의 겨울을 견디는 일은 혹독한 추위에 겨울잠을 자는 곰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게 한다. 북위 48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와 같은 위도상에 있는 밴쿠버의 겨울밤은 길고도 길다. 칠흑 같은 어둠에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만 들릴뿐 사방은 너무도 적막하다. 나는 자기 성찰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라고 긍정의 마음을 내며 새해 연하장을 쓰기 시작한다. 서리 꽃이 나뭇가지에 하얗게 핀 겨울 아침 나는 친정 고모님으로부터  이메일을...
조정
제135회 월간문학 신인 작품상 수상우리 외할아버지께서 퇴원하시는 날이었어요. 나는 학교 공부가 끝나자마자 집을 향해 달렸어요. 친구들이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불러도 못 들은 척하면서요. 할아버지께서 병원에 계신 동안 신나게 하던 게임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오늘 할아버지 정말 퇴원하셔?”오늘 아침에 나는 엄마한테 슬쩍 물어봤어요.그러나 엄마는 눈치 없는 대답을 하셨어요.“왜, 할아버지 보고 싶어?”하고요.우리 할아버지께선...
조정
특별한 인연 2015.08.29 (토)
“불성무물"이라 쓰인 화선지를 탁자 위에 펼치시며 선생님께선 잠시 감회에 젖으셨다.“오늘 초대에 대한 답례로 내가 좋은 글귀를 하나 써봤어요. 참 쉽지 않은 인연인데---, 이석 선생, 조 여사, 앞으로 열심히 정진하기 바라요.” 정성은 모든 것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중용의 “성자물지종시 불성무물( (誠者物之終始...
조정
감자꽃 한 다발 2015.07.10 (금)
노란 꽃술을 내민 흰 감자꽃 한 다발을 남편이 말없이 건넨다. 수확기를 앞두고 감자 알을 굵게 만들기 위해 꽃을 따내는 남편 옆에서 나는 잠시 감자꽃을 들여다 본다. 희고 보드라운 꽃잎 가운데 샛노란 꽃술을 뾰족이 내민 감자꽃은 너무나 앙증맞다.키 큰 미루나무 가지에 모여 앉은 멧새들이 소리 높혀 재잘대기 시작한다.“하얀꽃 피면 하얀 감자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바람을 타는 억새들의 사열을 받으며 콜로니 농장으로 가는 길 풍경은...
조정
  봄은 맨몸으로 겨울을 이겨 낸 나무들이 자축의 시간을 갖는 계절이다.   가지마다 수액을 끌어올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나무들은 깊은 밤 보는 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화사한 꽃을 피운다. 봄의 전령들이 대기 속에 가득한 오후 온 집안에 아마 씨 기름 향이  가득하다. 길고 긴 우기의 겨울을 보내며 남편이 깎고 다듬은 나뭇가지들은 그럴듯한 모양의 의자가 되었다. 세 번째 아마 씨 기름을 의자에 칠하는 남편의 표정은 사뭇...
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