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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1-03-02 11:08

사)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


미루나무 우듬지에서 새들이 요란스레 울고 있다. 언젠가부터 새 모이를 주는 일로 아침을 시작한다. 비대면을 강요받는 요즘, 아침마다 날아드는 새들도 이제 반가운 손님이다. 먼 곳의 봄소식이 새들의 깃털에 실려 올 것 같은 기대감일까….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참새, 박새, 까마귀들이 차례대로 모이통에 앉았다 날아오른다.오늘은 매서웠던 북서풍이 잦아들고 동풍에 얼었던 땅이 녹는다는 대한이다. 아침 일찍 투박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내다 보니 큰 상자가 문밖에 놓여있다. 집배원이 놓고 간 상자는 모서리가 젖은 채 플라스틱 백에 들어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마치 방물장수 보따리처럼 책, CD, 쪼그리, 보리 굴비, 말린 나물 몇 봉지, 장아찌 용기들이 빼곡히 들어있다. 꺼내든 물건마다 서울 사는 딸을 보는 듯 반갑고 애틋하다. 남편은 쪼그리를 궁둥이에 매달고 거실을 오가며 앉아 보기도 한다. 그 생뚱맞은 모습에 한바탕 웃고 나니, 딸은 우리를 웃게 만들 의도로 쪼그리를 보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밭일할 때 궁둥이에 매달고 다니다 쉽게 앉을 수 있는 쪼그리는 요즘 인기 있는 효도 상품이라고 한다. 더덕, 취, 당귀잎 장아찌를 갈무리하고 나니 온 집안에 당귀 향이 가득하다. 남편은 딸에게 긴 메시지를 보낸다. 딸이 이렇게 좋을지 모르고 아들이기를 바랬었다는 때늦은 후회와, 받은 선물에 대한 과장된 치하 그리고 시부모님께 더욱 신경 쓰기를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뒤늦게 펼쳐본 책갈피 속 카드에는 속 깊은 딸의 살가운 정이 깨알처럼 박혀있다. 딸의 다정함이 순은의 햇살 되어 살포시 내려앉는 순간이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손자 생일에 축하 선물을 보내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로 텔레비전과 게임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요즘, 남편이 고심 끝에 고른 선물은 어항이었다. 온라인 몰에서 판매하는 에코스피어(Ecosphere)라는 밀봉된 유리 어항엔, 모래가 바닥에 깔려있고 해조류와 산호 그리고 손톱만 한 새우 네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 어항은 오직 햇빛만을 필요로 하며, 새우는 해조류를 먹고 해조류는 햇빛을 받아 자라고 미생물은 이 둘의 배설물을 먹으며 살아간다. 공기와 물이 필요 없는 어항 안의 생물들은 자급자족하며 전체의 생명을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놀랍게도 이 환경에서 새우의 평균 수명은 5년이며 가장 오래된 것은 10년이라고 한다. 손자가 생명의 경이로움과 생태계의 상호 작용에 눈 뜨기를 바라는 마음에 남편은 이 어항을 고집했다. 요즘 이 어항을 관찰하는 손자는  할아버지께 새우의 안부를 문자로 전해주곤 한다. 앞으로 성장통을 겪는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할아버지는 나를 사랑해 주셨어!’하고 생각할 날이 있지 않을까! 먼 훗날 손자는 가족은 서로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지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가족끼리 연례행사로 주고받던 생일 선물이 점점 간소화되고 있다. 온라인 몰에서 기프트 카드를 사던지 현금을 송금하는 방식은 간편하고 효율적인 듯하나, 무언가 빠진듯한 허전함이 있다. 


나는 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소꿉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6.25 때 언니와 오빠를 천연두로 잃은 부모님은 노심초사 속에 나를 키우셨다고 한다. 공군 정비 장교였던 아버지는 두꺼운 알미늄 합금으로 만든 큰 소꿉 통 안에, 얇은 함석으로 솥, 냄비, 접시들을 만들어 넣어 주셨다. 손끝으로 함석을 구부려 접고 망치로 두들겨 올망졸망한 소꿉을 만들던 아버지의 정성은, 지금도 눈물겨운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조금 더 커서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타는 커다란 미끄럼틀과 그네도 만들어 주셨는데, 나는 가끔 미끄럼 타는 사진 속 그 아이가 되어 본다.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믿게 해준, 내 기억 속에 각인된 완벽하게 평화롭던 시절이었다. 

‘아버지, 오늘도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봅니다. 제가 울면서 아버지 손을 잡고 치과에 가는 길이었어요. 제 손을 꼭 잡은 긴 코트 차림의 아버지 손에는 과자 봉지가 들려있네요.’ 

이제 세상은 바뀌어 무엇이든 물질적 효율성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 그러나 자식이 무탈하기를 빌던 60여 년 전 아버지의 간절함은, 지금도 금빛 후광으로 나를 감싸고 있다. 때론 토네이도의  위력으로 어두운 터널 속에 갇힌 나를 밖으로 밀어내, 삶의 박동 소리를 듣게 하신다. 

 “괜찮아, 아버지가 네 손을 꼭 잡고 있으니….”

나의 영원한 호위무사는 오늘도 무언으로 내 곁에 머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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