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양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삼십여
년 전 고모님 내외분께서 함께 북미주 첫 나들이를 오셨다. 고모님의 막내둥이가 텍사스 주
오스틴(Austin) 대학에서 피아노 석사 공부를 하고 있어서 딸 방문 가시는 길에 북미의 다
른 지역에 살고 있는 조카들을 먼저 만나고 마지막 목적지로 가시는 계획이셨다. 오랫동안
시어른을 모시며 전통적인 한국식 생활을 하던 중이셔서 해외 나들이로 처음 방문하신 큰
조카의 서구식 절충 생활이 신통하고 새롭게 보이셨을 것이다. 주부
로서의 눈은 우선 부엌과 식생활
환경이 제 일의 관심사이다. 주발의 밥과 대접의 국 대신에 접시를 하나씩 앞에 놓고 덜어
먹는 방식이 낯설지만 마음에 드신 것 같다. 아침 식사로 빵을 구워서 버터와 잼을 바르고
달걀의 요리 방식을 바꿔 가며, 자몽(Grapefruit)의 몸통을 둘로 쪼개서 칼집을 내어 드시게
해드렸더니 하나하나가 새롭기도 하고, 댁으로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리라는 계획을 마음
속에 세우신 것 같다. 따님에게나
다른 조카들에게 먼저 다녀오셨더라면 이런 일들이 그다지 새롭지 않으셨을 터인데 밴쿠버
에서부터 여정을 시작하셨으므로 여러가지가 새로우셨나
보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신 뒤에는 바로 ‘접시 문화’로
바꾸시고 아침 식사는 ‘빵 식’으로, 그리고 그 때로부터
자몽을 좋아하게 되셨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고모님께서 연로해지심으로 최근 몇 년 동안은 양로원에서 지내셨고 올 해는 코로나로
인한 외로움도 느끼며 계셨을 텐데 지난 달에 95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으로, 먼저 가신 남
편 곁으로 떠나셨다. 남은 가족과 친지들이 고모님과 헤어짐을 애석해
하는 중에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카카오 톡으로 조의를 보냈다. 오랫동안 잠
잠하던 나눔 방에 세계에 퍼져 있는 사촌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서로의 안부를
물음으로 그동안 전하여서만 듣던 소식을 직접 알게 되어 매우 반갑고 분주하다. 모친 상을
당한 자녀들의 마음이 힘든 시기에 각 사촌들은 고모님과 얽힌 사랑의 추억들을 쏟아 내놓
으니 매일 새롭고 또한 궁금하던 소식들이 기다려진다. 자녀들은 이런 소셜 미디어 덕분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바란다. 미국 뉴욕에서부터 시카고, 나성, 캐나다 밴쿠버, 한국
의 서울, 부산, 중국의 상해, 인도에까지 펼쳐져 있으니 해가 지질 않는다. 직종도 다양해서
서로의 전문성을 알게 되고, 또 은퇴 후에 에티오피아에서 의료 선교사로 봉사하는 한 사
촌의 새로운 삶의 이야기로 하루가 얼마나 흥미롭게 지나는지 모른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
러스
때문에 현직에 있는 교수들은 빈 강의실에서 혼자 영상강의를 하고, 나를 포함한 주부들은
부엌을 놀이터 삼아 지내면서 이 통신을 매우 즐기고
있으리라. 이 단체 방의 이름을 이전에는 가칭 “사촌 형제들” 이라고 했는데 이제 “78 번지
사랑방”이라고 문패를 바꿨다.
<종로구 사간동 78 번지>는 내가 유년기로부터 캐나다에 올 때까지 살던 집의 주소다.
사 대가 함께 살아온 대가족의 표본인 집이다. 큰조카인 까닭에 고모님의 처녀 시절, 삼촌
들의 총각 시절을 제일 많이 함께 보냈으므로 어느 동생,
사촌들 보다 추억이 많다. 조부모님 이야기
로부터 부모님 세대를 거쳐, 내 세대의 형제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기억해 내는 것이 요즘
나의 일과가 되었다. 지금은 78번지 자리에 ‘금호 미술관’이
있고 그 옆에는 ‘두가헌’ 이라는, 기와 지붕을 그대로 보존한 고급 양식당이 들어서 있다.
고모님의 90세 생신 때에는 옛날을 추억하시도록 일가 친척들을 이곳에 초대하여 생신 파
티를 했다. 뜻 깊은 잔치였다고 들었다. 작년에 손주들
데리고 모국 방문 갔을 때 우선적으로 이곳에 가서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며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고모님을 찾아 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작별이 된 것이다.
조부모님 슬하에 4남 2녀를 두셨고 그 다음 세대가 스물 세 명으로 늘어서 세계
여러 곳에 퍼진
것이다. 아무개 형, 아무개 아빠라고 하며 호칭이 나오니 순서가 알쏭달쏭 하다고 서열(족
보) 정리를 해야겠다고…… 스물 세 명의 다음 세대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는지 얼른 셀
수가 없다.
고모님은 떠나시면서 우리들을
“78번지 사랑방”에 다 모아 주셔서 매일 감사드린다. 언젠가는 우리 세대를 한 자리에 모아
보고 픈 막연한 꿈을 가졌었는데 이러한 모양으로 지금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사랑방의 속삭임과 얽힌 사랑의 이야기들이 대를 이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지금도 옛 집의 처마 밑 풍경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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