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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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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0-04-27 16:55

윤의정 / 캐나다 한국문협


어릴 적 맞벌이인 부모님 덕분에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다. 오빠와 여동생, 그리고 나로 이루어진 우리 형제자매는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났는데, 그래서인지 엄격하기도 하고 조금은 옛스러운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 보면 이해할 수 없던 일들도 있었지만, 당시는 너무도 당연한 것들도 많았다.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아 호호 불다가 입에 잠시 머금고는 식혔다며 입에 쏙 넣어 주시기도 하셨고, 당신의 사고방식으로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며 오빠와 자매인 동생과 나를 차별하셨던 것도 같다. 화장실에서 쓰는 휴지는 꼭 두 마디만 쓰라 하셨고, 불을 켜 놓고 돌아다니면 혼나기 일쑤였다. 반찬이 없다고 투정하면 그 식사는 걸러야 할 정도로 엄하게 하셨고, 그게 나는 일상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 당시가 마냥 힘겹고 답답하기만 했는가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슈퍼에서 사 먹는 과자보다 할머니께서 구워 주신 옥수수, 고구마에 익숙해져 아직도 나는 건강한 맛을 좋아한다. 아이들을 키우며 손수 하나하나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힘든 것인가를 알게 되니, 할머니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이 희생하셨고, 큰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어린 시절은 추억이 가득할 정도로 정감도 있었고 그 기억 때문에 삶에서의 어려움에 나는 그다지 좌절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또 한편 지금의 풍요로움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코로나로 사재기가 막 시작되었을 때, 나는 딱히 마트에 가서 줄을 서지 않았다. 덕분에 집에는 휴지가 간당간당 했고, 걸레대신 쓸 수 있는 일회용 걸레나 티슈들도 거의 떨어져갔다. 혹자는 왜 준비를 하지 않냐고 했는데 썩 그 줄에 서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일견 마음 속 깊이 그렇게 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보단 차라리 그간 잊고 지낸 아껴 쓰던 버릇을 떠올리며 낭비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가 무척이나 생각났다. 며칠 밤, 며칠 낮 동안.


그리고 아이들에게 내가 배웠던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이리저리 찢겨 뒹굴거리던 두루마리 휴지를 들어올리며, 물자를 절약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먹을 것을 남기는 아이들에게 먹을 만큼만 덜어서 정량을 챙겨 먹도록 알리고, 전등 불을 끌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들을 다시 불러 세워 불을 꼭꼭 끄고 다니라고 몇 차례 일렀다. 물 티슈를 뽑아 쓰윽 닦던 얼룩들도 걸레를 빨아 닦고 또 빨고, 말려서 다시 쓰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코로나의 여파와 함께.


어쩌면 삶의 평안함과 풍요로움만 알고 지낸 우리 아이들에게도 아끼는 법을 조금은 알려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중요함을 모르고 아낄 줄 모르던 나 자신의 삶 자체에도 반성의 마음도 들었고 말이다. 지난 시간을 잘 생각해보면 발전에 발전만 거듭했던 것 같은데, 그게 과연 맞는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제시대를 겪으시고, 전쟁을 겪으셨던 할머니는 하루하루 어떤 마음가짐이셨을까? 아끼는 것이 몸에 배셨던 그 삶을 지금에 서야 생각해본다.


지금의 어려움은 어쩌면 할머니께서 경험하셨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내 삶에서 맞부딪힌 또 다른 전쟁의 또 다른 모습일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다시 어려서 배운 할머니의 삶을 따라가보고자 한다. 아끼고, 아껴서 대비를 하는 모습. 아마 당신 만을 위하셨던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그리하시지 않았을까 이제서야 할머니를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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