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 수상하다.
‘사회적 거리’는 인간 관계의 단절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양식을 뒤바꾸어 놓았다. 악수가 사라지고, 출근과 영업이 사라지고, 예배와 집회가 막히고, 교실은 폐쇄되고……. 마스크를 하고 나선 산책길에서 만난 나뭇가지에는 새 순과 꽃 몽우리가 지천이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내가 알던 그 봄이 아닌 것이다.
인간인지라 이럴 때 일수록 그 끝이 언제인지가 궁금해지지만, 끝은 차라리 모르고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마음은 또 얼마나 인간을 방자하고, 본래의 모습대로 교만하게 할지…
이런 시간을 지혜롭게 넘기는 방법 중에 하나가 좋은 글을 읽으며 위로와 기쁨을 얻는 길이리라. ‘나는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을 위하여 글을 써왔다. 시나 수필이나 다 나의 어쩌다 오는 복된 시간의 열매이다.’ 금아 피천득 선생의 문학관이다. 작은 체구에 어린 아이 같은 웃음으로, 소탈하면서도 충일한 삶을 살았던 그는 ‘앵두와 어린 딸기’같은 풋풋한 글과 함께 영원한 소년으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특별히 그의 글 가운데서도 ‘봄’과 관련된 작품들을 대하노라면 그의 표현대로 ‘녹슨 심장에 피가 용솟음치는’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금아(琴兒)는 벌써 10여년전에 우리 곁을 떠났지만, 지금 다시 봄은 우리 곁을 찾아오고 있다.
내게 효과가 있는 다만 하나의 강장제는 따스한 햇볕이요, ‘토닉’이 되는 것은 흙 냄새이다. 이제는 얼었던 혈관이 풀리고 흐린 피가 진해지는 것 같다. (‘早春’에서)
겨우내 나가보지 않던 뒷마당을 봄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나아가 걸어보았다. 어느새 가지 끝마다 어린 새순이 돋아나고 숨죽이던 잔디도 고개를 들어 반긴다. 여린 새 순 잎에 반해 한참동안 서성거리며, 햇볕과 흙 냄새에 취한다. 어린 시절 봄은 얼음장 밑으로 제일 먼저 소리로 다가오는 줄로만 알았는데 봄은 제자리에 감추어져 있다가 다시 소리 없이 들어나는 것임을 깨닫는다. 아마 그래서 계절의 이름도 다시 반갑게 보게 됨을 기억하며 ‘봄’이라 부르지는 않았을까... 이 봄, 고통의 시간을 허락한 창조주의 섭리와 그 가운데에도 진정 아름다운 자연의 순환과 그리고 나의 존재 까지도 다시금 제대로, 찬찬히 들여다 ‘봄’을 소망해본다.
겨울이 되어 외투를 입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봄이 되어 외투를 벗는다는 것은 더 기쁜 일이다. (‘早春’에서)
상처를 안고 사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겨우내 우리는 두터운 외투 속에 상처와 드러내기 싫은 나약함을 감추고 지내온다. 그리고 마치 동면하는 것처럼, 긴긴 겨울 밤을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자신의 피부와 뇌리 속에 비축해둔 자양분만으로 한겨울을 나고는 한다. 외로움이 가져오는 문학적 성취를 놓고 보자면 그것도 혼자만의 큰 기쁨이 되리라. 그러나 이 봄, 외투를 벗어 감추었던 상처를 들어낼 수가 있음에 역설적으로 더더욱 기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오히려 밝은 곳에 훨훨 털어놓을 때 가벼워지고 마침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비록 청춘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왕궁에 유폐 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봄’에서)
초조와 번잡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며, 그저 좋은 글 한 줄 얻기 위해 뒤척이는 지난 밤의 불면이 지금 나에겐 행복임을 깨닫는다. 녹슨 심장에 피가 다시 용솟음치게 하는 이 봄. 또 한 번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그 무대를 열어주는 이 봄. 우리 생의 진정한 가치를, 그 절대적 존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하여주는 이 봄. 아- 우리 곁에 다시 ‘봄’이 오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봄도 물론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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