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전나무와 향나무

민정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4-02-12 09:06

민정희 /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나무를 잘랐다. 앞마당에서 전나무와 함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던 향나무였다.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해가 지나 서로의 몸체가 불어나면서 향나무 가지가 전나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향나무와 맞닿은 전나무 부분은 푸른색을 잃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향나무를 진즉 다듬어 주어 서로의 간격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나무에 대해 잘 몰랐던 무지함과 게으름의 결과였다. 뒤늦게 다듬어 보지만, 문제를 해결하기엔 나무들은 이미 커져 있었다.
  
   잘린 향나무의 뿌리를 캐냈다. 한 생의 뿌리는 깊고도 넓었다. 이십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고, 당연히 있었어야 할 나무가 빠져나간 자리. 마치 폭탄을 맞은 듯 움푹 파여 황폐했다. 전나무의 상흔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한 친구로 인해 남아 있는 내 마음의 빈터를 보는 것 같아, 가슴 속엔 싸한 공허가 맴돌았다.
  
   한 친구가 있었다. 이곳 캐나다 땅에 새로이 발을 붙이고 사람이 그립던 시절에 만난 유학생 엄마였다. 그녀의 나이는 나보다 어렸지만, 맏딸의 의연함이 배어 있는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막내로 자란 나와는 궁합이 잘 맞았다. 우리는 십여 년간 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늘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어느 날부터 우리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친하다는 이유로 내가 가장 우선이 되어야만 한다는 이기심과 집착이 발로였던 듯했다. 어쩌면 이민 생활의 좁은 세계와 외로움에서 비롯된 편협한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한걸음 물러서, 거리와 시간을 두고 성찰했어야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마음과 그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야 말았다. 언젠가는 꼬인 매듭을 풀고 관계를 돌릴 생각이었다. 다만, 적당한 시점을 잡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갑자기 고국에 볼일이 있어 몇 달 다녀왔다. 그사이에 한국으로 급히 돌아갔다는 그 친구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국에 홀로 남아있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병 때문이었다고 했다. 엇갈리는 운명에 연락이 끊겼고 결국은 서로의 감정을 풀지 못한 채 어영부영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당연한 것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쑥스럽고 거리감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매개체인가. 그중 가장 짧고 기본적인 말 두 마디를 주저하는 나의 못난 모습을 들여다본다. 가족이기에, 친구이기에, 대화 없이도 소통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가까워질수록 배려는 부족해지고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작은 어긋남에도 크게 섭섭해하거나 쉽게 분노하기도 한다. 가까우니 무조건 내 편이어야 한다는 억지스러움 때문은 아니었는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 미리 인정하고 대화했다면 그렇게 속절없이 헤어지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가까운 사이였기에 더 말하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향나무를 품었던 텅 빈 자리. 그 옆에는 상처 입은 전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린 채 홀로 서있었다. 결코 재생되지 않는 갈색으로 변해버린 전나무의 상흔을 가려주기 위해, 다시 그 자리에 나무를 심어야 했다. 며칠 동안 다니며 살펴봤지만, 모양도 크기도 적당한 나무를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또 향나무를 그 자리에 심기로 했다. 전나무는 다듬을 수 없지만, 향나무는 원하는 대로 다듬어 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내가 변해야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듯했다. 어느 정도 큰 묘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그루로는 그 자리가 채워지지 않았다. 나무를 너무 가까이 심으면 안 된다는 진리를 체험으로 터득했지만, 결국 세 그루의 묘목을 심음으로써 스산한 빈자리를 메꿀 수 있었다.
 
   나무의 조화에서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전나무와 향나무가 같은 사철나무지만 자라는 형태와 성질이 다르듯이, 서로 다른 성격의 인간이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 중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도 귀한 인연인가. 늦기 전에 소중한 관계들을 되돌아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지가 삐쭉 자라 누군가를 찌르고 있지는 않은지.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전나무와 향나무 2024.02.12 (월)
   나무를 잘랐다. 앞마당에서 전나무와 함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던 향나무였다.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해가 지나 서로의 몸체가 불어나면서 향나무 가지가 전나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향나무와 맞닿은 전나무 부분은 푸른색을 잃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향나무를 진즉 다듬어 주어 서로의 간격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나무에 대해 잘 몰랐던 무지함과 게으름의 결과였다....
민정희
아버지의 뒷모습 2023.12.11 (월)
 딸아이를 만나러 시애틀에 갔다. 거의 일 년 만이다. 마중 나온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내 품 안으로 파고든다. 어색하게 끌어안으며 살가운 냄새를 맡는다. 새로 이사한 집을 둘러본다. 이 많은 짐을 혼자 싸고 풀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찡하다. 홀로 살아도 갖추어야 할 것은 한 가족이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직도 어린애 같이 느껴지는 딸아이가 또 다른 나라에서 직장 다니며, 잘 적응하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
민정희
숨고르기 2023.10.11 (수)
  누렇게 뜬 무청이 눈에 띈다. 괜히 억척을 부렸나 보다. 어제 다용도실에 놓아두고 늦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깜박하고 반나절이나 지난 지금 생각난 것이다.  성당 후문에는 일요일에만 오는 야채 트럭이 있다. 밭에서 직접 따온 신선한 야채에 늘 마음이 끌렸지만, 오후에 약속이 있거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기에 한 번도 사본 적은 없었다. 어제 미사를 끝내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미사 후 부부 동반 모임이...
민정희
갑자기 떠난 여행 2023.05.15 (월)
  “엄마 우리 떠나요.” 저녁 늦게 퇴근한 딸아이가 현관문을 들어서며 외친다. 오늘 회사를 퇴직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예약해야지?” 두서없는 물음표가 튀어나오며 머리 회전이 빨라진다. 떠나자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출렁거린다. 아직 방학을 안 했고 평일이니 캠프장에는 자리가 있다고 한다. 남편과 아들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지하실로 내려간다. 한 번도 쓰임을 받지 못하고 고스란히 먼지를 쓴 채 박혀 있던 텐트를 찾기...
민정희
불편한 배려 2022.12.27 (화)
 오랜만의 고국 나들이였다. 친구의 소개로 미용실에 갔다. 미용사는 자신의 미용 기술에 대한 긍지와 자존감이 남달리 높은 남자였다. 그는 내 머리칼이 관리를 안 해 힘이 없고 부실하다고 했다. 자극을 줘야 머리칼이 튼튼해지고 빠지지 않는다며, 의향도 묻지 않은 채 머리 마사지부터 하기 시작했다. 꾹꾹 누르고 털고 당기고 하는데, 고통스러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프다고 신음하며 그만해도 된다고 부탁해도, 이렇게 해야 머리가...
민정희
나의 세계 2022.02.28 (월)
 벌써 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신춘문예 입상이라는 뜻밖의 타이틀은 내 인생의 하반기에 또 다른 고지로 향하는 출발점이었다. 새로이 맞이한 공간 속에서, 고래가 물을 뿜듯 분출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설레임과 흥분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빈 여백을 채우던, 벅찬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초창기에...
민정희
언뜻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다. 미장원에 간지도 일 년이 넘었다. 화장조차 안 한 지도 꽤 되었다.옷장의 옷들은 하릴없이 늙어가고, 나 역시 옷 몇 벌로 사계절을 보냈다.   하얗게 센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반은 희었고 반은 예전에 염색한 부분이 남아 있다. 영락없는할머니 모습이다. 육십이 훌쩍 넘었으니 나이에 맞는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왜 이리도 거부감을느끼는 것일까. 머리가 세기 시작한 때부터 흰머리가 돋아나기 무섭게...
민정희
민정희 / 사) 한국문협 벤쿠버지부 회원옷장 정리를 하다 교복을 발견하였다. 중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부모의 결정에 따라 이곳 캐나다로 이민 오게 된 딸아이의 것이다. 더는 입을 일이 없는 교복을 왜 이민 보따리에 넣어 갖고 왔을까. 그 시절의 아이를 기억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의 그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서인가. 교복을 펼쳐본다. 순수하고도 신선한 냄새가 전해온다. 규율과 절제, 금기와 인내의 단어가 떠오른다. 냉혹한 현실에...
민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