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희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벌써 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신춘문예 입상이라는 뜻밖의 타이틀은 내 인생의 하반기에 또 다른 고지로 향하는 출발점이었다. 새로이 맞이한 공간 속에서, 고래가 물을 뿜듯 분출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설레임과 흥분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빈 여백을 채우던, 벅찬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초창기에 썼던 글들을 꺼내 보았다. 희미하던 머릿속에 반짝 불이 커졌다. 글이 아니었다. 말이었다. 고여있던 말을 이야기하듯이 무심코 내뱉고 있었다. 비록 문장은 다소 투박하지만, 그 속에는 순수하고도 진심 어린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왜 글이 안 풀리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저 하고픈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려고 너무 힘을 주다 보니 양어깨에 허영의 날개가 돋아난 것이다. 내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서,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의 꼬리까지 달고서. 그 짧은 날개로 날아보려 하니 결코 날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무용할 때의 경험이 되살아난다. 무용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겐 먼저 팔과 어깨에서 힘을 빼는 훈련을 시킨다. 수없이 많은 연습을 통해 어떤 순간이 와도 몸이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힘이 빠졌다 해도, 잠시 분심이 들거나 조금이라도 잘하겠다는 욕심이 생기면 여지없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일단 힘이 빠지면 그 때부터 어떤 몸짓을 하던 춤이 되는 것이다. 잘 추고 못 추는 일은 그다음의 순서이다.
글을 안 쓰고도 남은 내 삶에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본다. 문득 지난날,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용을 그만둔 적이 있었다.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무용을 그만두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무용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 어떤 곳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텅 빈 마음은 허공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좋은 음악만 들리면 머릿속에 펼쳐지는 안무와 동작들이 나래를 폈고, 어쩌다 무용부 학생들이 무용하는 것을 보면 가슴에 싸한 통증이 밀려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내 마음 속 불씨는 되살아났고 욕망은 물결 되어 일렁이고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용을 전공했지만, 무용단에 가고자 하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용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서 주로 가르치는 무용은 교육 무용이나 포크댄스, 한국무용이나 발레의 기본 동작이었다. 교육 프로그램이 전부였던 무용 시간은 여학생들의 건강한 신체와 정서 교육을 위한 교과 과정의 한 구색일 뿐이었다. 무용을 가르치는 일보다 담임으로서의 업무와 잡무가 더 많았고 정작 내가 가고자 했던 창작이나 예술의 길은 아득히 멀리 있었다. 가슴속에 타오르던 불꽃은 현실에 대한 타협과 그로 인한 타성에 젖어 서서히 사위어졌다.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틀에 박히지 않은, 표현하고 싶은 갈망이 아니었을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라고 그의 책 명상록에서 말했다. 쓰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나에게 무용이나 글은 영혼의 떨림을 간직한 내 내면의 숨구멍이었으며, 삶의 원동력이었음을.
이제는 생활을 위해 일선에 나갈 필요가 없다. 그동안 몸담고 활동했던 무용단에서도 은퇴하였다.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무엇에 목표를 두고 나를 다그치며 몰고 갔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글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몇 배의 고통을 안겨 주는 희열이기도 했다. 그 고통 속에는 마약 같은 달콤함이 있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길에서 생의 끝까지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준다.
글은 나 자신만의 세계이다. 나의 사유는 물론 성격, 가치관까지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마음의 분신이라 할 수 있겠다. 누군가와 비교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다. 고유의 영역이며 나만의 철학이 담긴 나의 성채(城砦)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비가 될 꿈을 가진 번데기가 고치 속에서 긴 시간, 인내의 터널을 거치며 스스로 변화하는 과정과도 같다. 변화의 과정이 없이는 고치를 찢고 나올 수 없 듯이,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 아닐까.
잔이 넘쳐야 흐르듯,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세월을 쏟아냈다면 이제 다시 잔을 채워야 할 터. 누에가 고치를 틀기 위해 뽕잎을 많이 먹어둬야 하듯이, 자신의 세계를 채우기 위한 내면의 양분을 충분히 취해라 하리라. 어떤 나비가 되어 나의 세계를 펼칠 수 있을지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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