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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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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2-12-27 16:22

민정희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오랜만의 고국 나들이였다. 친구의 소개로 미용실에 갔다. 미용사는 자신의 미용 기술에 대한 긍지와 자존감이 남달리 높은 남자였다. 그는 내 머리칼이 관리를 안 해 힘이 없고 부실하다고 했다. 자극을 줘야 머리칼이 튼튼해지고 빠지지 않는다며, 의향도 묻지 않은 채 머리 마사지부터 하기 시작했다. 꾹꾹 누르고 털고 당기고 하는데, 고통스러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프다고 신음하며 그만해도 된다고 부탁해도, 이렇게 해야 머리가 건강해진다며 억센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시차와 치과 치료로 피곤이 겹친 상태라 머리 피부는 평소보다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도저히 말릴 틈이 없었다.
 
  마치 고문을 당한 듯 파마를 끝내고 나오면서 별생각이 다 들었다. 평소에 깐깐한 친구 성격에 억하심정이 있었나. 혹시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아니면 실력 좋은 미용사가 변두리에 자리 잡게 된 욕구 불만의 해소인가. 하지만 그것은 서비스 정신에 바탕을 둔 분명한 배려였다. 그냥 파마나 해주고 말 것이지 왜 힘들게 과외의 마사지를 해 주겠는가. 단골이 될 여지도 없는 캐나다에서 온 손님한테 말이다. 비록 선의의 배려였다 해도 받는 이가 불편하다면 진정한 배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문득 오 헨리의 단편 소설 <마녀의 빵>이 생각났다. 빵집 주인은 화가인 듯 보이는 청년에게 관심을 갖는다. 금방 구워진 따뜻한 빵이 있는데도 하루 지난 굳은 빵을 사 가는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뭔가 베풀고 싶은데 청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우려한다. 어느 날 기회가 있어 청년 몰래 굳은 빵을 잘라 아침에 배달 온 신선한 버터를 듬뿍 넣고 여며준다. 그러나 그 버터로 인해, 공모하기 위해 3개월간 공들여 온 청년의 설계도를 망치게 된다. 청년은 그 빵을 지우개로 썼던 것이다. 빵집 주인에게는 마음 따뜻한 배려였지만 상대에게는 치명적인 해가 되었다.
 
  이 소설은 인간관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오류의 감정을 말하고 있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따뜻한 빵에 비해  값이 싼 굳은 빵 만을 사 가는 청년을 가난하다고 생각한 오판과, 자신이 넣어준 버터가 들어간 빵을 먹으며 자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집에 오며 배려라는 명목으로 누군가에게 불편을 준 적이 없는지 되짚어 본다. 우선 주부의 입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식탁을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상대편 앞으로 밀어주거나 권유하곤 하는 내 모습을 본다. 내 배가 고프면 가족의 밥을 많이 푸고 내 배가 부르면 가족의 밥을 조금씩 푸게 된다. 짜고 맵게 먹는 나는 가족의 건강을 위해 머리로는 싱겁게 음식을 한다고 하면서도, 소금과 고춧가루에 분주히 손이 가는 것을 알아채곤 한다. 늘 차리는 밥상에서 생기는 사소한 행동조차 내 입장에서 배려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각한다.
 
  남편의 하소연이 떠오른다. 심장병 수술을 받은 남편에게 쌀밥이나 밀가루 음식은 독이 될 수 있었다. 쌀을 줄이고 잡곡을 많이 섞어 밥을 했다. 남편은 잡곡밥이 소화가 안 된다며 쌀밥을 원했다. 조금 덜 살더라도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며 살자고 했다. 나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소리라고 무시하며, 잡곡밥에 대한 신념을 포기 하지 않았다. 남편의 건강을 위한 배려였지만, 소화 기능이 약한 남편에게는 마녀의 빵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힘과 기술을 겸비한 미용사의 배려 덕분에 또 하나의 깨우침을 얻는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행하는 것은 배려가 아니며, 상대의 거절을 존중하는 것 또한 배려의 연장이라는 것을. 배려심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이타심에 근본을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타심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는 설도 있다. 배려하기 전에 상대를 위한 배려인지 혹시 내 만족 때문은 아닌지를 먼저 살펴봐야 하리라.
 
  집에 돌아가면 남편에게 쌀밥을 해 주어야겠다. 그 대신 탄수화물은 다른 음식에서 조절해야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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