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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머리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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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1-11-24 10:05

민정희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언뜻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다. 미장원에 간지도 일 년이 넘었다. 화장조차 안 한 지도 꽤 되었다.
옷장의 옷들은 하릴없이 늙어가고, 나 역시 옷 몇 벌로 사계절을 보냈다.
 
  하얗게 센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반은 희었고 반은 예전에 염색한 부분이 남아 있다. 영락없는
할머니 모습이다. 육십이 훌쩍 넘었으니 나이에 맞는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왜 이리도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까. 머리가 세기 시작한 때부터 흰머리가 돋아나기 무섭게 염색해 왔으니, 미처 나의
본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더는 염색으로 위장하지 말자고 결심을 해 보지만, 흰머리
사이사이 남아있는 검은 머리가 도리어 신경 쓰인다. 마치 단풍 속에 채 물들지 않은 초록 잎사귀처럼,
나이 들어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마음과도 같다.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엄마는 늦둥이로 나를 낳았다. 친구들 엄마보다 족히 20년은 나이 차이가
났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도 한복에 쪽을 찌고 있었다. 부모님이 학교에 오는 날이면 젊은 엄마들에
비해 할머니 같은 엄마가 부끄러웠다. 큰 올케한테 엄마 대신 와 달라고 조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얼마나 서운했을지 가슴이 아리다. 어느 날 올케의 권유로 엄마가 머리를 잘랐다. 산뜻한
커트에 살짝 웨이브를 넣은 파마는 엄마의 모습을 달라지게 했다. 늙음의 상징이기만 했던 흰머리는
은빛으로 우아하게 빛났다. 은발이 그토록 품위와 세련미를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엄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때론 머리는 마음을 대변하기도 한다. 심경에 변화가 생기거나 새로운 결심이 필요할 때면,
파격적으로 머리 스타일을 바꾸기도 하므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대학에 가려면
공부에 전념해야 하니 무용을 그만두라고 했다. 예술을 하면 배고프다는 편견을 고집스럽게 갖고
있어,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전국대회 입선까지 했던 넷째 오빠도 끝내 미술 전공을 하지 못했기에.
나 역시 반항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까지 무용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무용선생님은 안타까워하며 아버지가 마음을 돌릴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머리를 자르지 말라고
하셨다. 머리를 기르는 것은 무용부 학생들의 특권이었다. 방과 후면 내 발길은 절로 강당으로 향하곤
했다. 무용부 학생들은 남아서 공연 연습을 하였고, 전공할 학생은 대학 콩클 준비를 하기도 했다.
어느새 그 앞에 서 있는 나를 인식하고 힘없이 돌아서는 길에, 들려오던 무용음악은 내 가슴을 뛰게도
아프게도 했다. 나는 미련을 끊기 위해 양 갈래로 땋아 내렸던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강당 앞으로는
지나가지도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머리는 저절로 자랐고 미련도 끈질기게 자랐다.
결국은 무용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아마도 막내라는 특별한 위치의 응석이 통했는지도 모른다.
 
  머리는 그 사람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머리 스타일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늘 머리를 미장원에서 관리해 왔다. 화장하고 때와 장소에 맞춰 옷을 입는 것
또한 외출의 기본 준비였다. 그러나 사회적 삶이 정지된 상태에서 굳이 머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거울에 비치는 추레한 모습도 참고 버텼다. 어쩌면 그동안의 나의 삶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었을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면을 채우는 일만큼 외면을 가꾸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내면의 향기가
외면을 물들일 수 있는 것처럼, 외면의 정갈함 또한 내면을 바로 세울 수 있음이니. 우아한 늙음은

잠시 보류하기로 하자. 머리가 온전히 희기까지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 오늘 나는, 머리하러 간다.
타인이 아닌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를 사랑하기위해, 아니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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