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일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매년 휴가의 대부분은 한국에 계신 어머님을 방문하는 데 사용한다. 이민을 오면서 동생 가족과 함께 사시는 어머님은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9 남매의 장남인 아버님은 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시 부모님을 모시고, 네 명의 출가 전인 고모들과 삼촌들과 함께 살며 출가시키셨고, 우리 3 남매를 키웠다. 그리고 또 작은아버지의 세 명의 자녀를 고등학교까지 키우셨다. 우리 집은 늘 북적였다. 어머니는 손님 아닌 손님을 늘 대접하느라 바쁘셨다. 어머니는 아파도 제대로 쉬실 수가 없었다. 그 힘든 삶 속에 위안이 되고 희망이었던 것은 자식들이었고, 자식 중에서도 나를 가장 의지하셨다. 그런데 우연히 교육 직 분야에 종사했던 사람을 대상으로 영주권을 부여하는 이민 광고를 보고, 아이들이라도 학교와 학원 사이에 쳇 바퀴를 도는 교육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이민을 신청했고, 영주권 비자를 받았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그 사실을 캐나다로 오기 한 달 전 쯤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이민 생활에 적응을 못하면 1년 2년 있다가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아이들 교육 때문에 잠깐 캐나다에 갔다 온다고 한 것이 벌써 10년도 더 지나가 버렸다.
한 달 하고도 이틀의 휴가면 한국에 계신 어머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또 여행도 하고, 맛있는 식당도 찾아다니고, 미술관도 가고, 극장도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만나고, 집에 고장 난 것도 수리하고도 남을 기간인지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또 짐을 싸야 한다. 욕심이 큰 계획이었다. 집 수리도 일부밖에 못 하고, 문화 활동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못 만나고 또 떠나야 한다. 아쉬움을 남기고 못다 한 것은 다음 휴가의 목록으로 담아둔다.
이별은 수없이 해왔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그 이별 중에 몸이 편찮은 어머니와 헤어짐은 가장 무거운 일이다. 간신히 거동 하시고, 단기 기억도 예전 같지 않으시다. 어머니는 이민을 온 이래 계속해서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종용하신다. 그러나 아이들을 캐나다에 두고 돌아갈 수도 없고, 아이들의 한국 적응이 걱정되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둘째 아들이 장학금을 제공하는 토론토 대학으로 간다고 했을 때야 비로소 난 어머니가 아들과 헤어지는 감정이 어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들이 혼자서 해나갈까 걱정도 되고, 각별하게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 그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2주 이상을 UBC를 가도록 설득했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혼자서 생활하는 연습을 하게 했고, 대학을 졸업 후에 토론토 대학원에 가도록 했다. 성인이었음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고 걱정이 되어 아들과 아내와 함께 토론토로 같이 갔고, 아들이 자취하면서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살림살이를 준비해 주었다. 헤어지면서 아들과 눈물의 포옹을 한다. 참으로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밴쿠버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나와 헤어질 때도 그 느낌일 것이다.
밴쿠버로 돌아올 때 어머님을 항상 눈물로 배웅하신다. 너무 마음이 무거워 어느 해에는 새벽에 몰래 집을 나와서 공항으로 향했다. 밴쿠버로 돌아와서 전화 드렸을 때 화도 내시고 더 섭섭하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무거워도, 새벽에 주무셔도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향한다. 지금은 초기 치매 증상으로 단기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인지 만났을 때 흘리시던 반가운 눈물도 또 헤어질 때 흘리시던 서운한 눈물도 많이 줄었다. 작년부터인가 어머니는 언제 한국에 들어오느냐고 묻지 않으신다. 대신 너희들만 잘 있으면 된다고 하신다. 하지만 여전히 이 아들을 기다리시는 어머님의 간절함을 어찌 모르겠는가?
새벽 5시 15분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궂은 날씨 속에 지연 출발한 항공기는 밴쿠버로 오는 몇 시간 동안 기류에 심히 흔들렸지만, 밴쿠버에는 예정 도착 시간보다 30분 가량 빠르게 그리고 사뿐히 착륙했다. 쾌청한 날씨가 나를 반기듯 했다. 컴퓨터로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고, 캐나다 시민권자의 입국 검사를 기다린다. 긴 줄은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었고, 드디어 입국 심사관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얼마나 외국에 나가 있었는지 그리고 왜 나갔는지 물어본다. 어머니를 방문하러 한국에 갔다 왔다고 대답하니, 더 이상 질문 없이 “Welcome back home”이라고 말하며, 통과를 시킨다. 이 말이 슬픔에서 잠겼던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깨운다.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어머니가 계신 한국인데, 캐나다가 어느덧 제 2의 고향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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