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석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중남미 선교지에 나가 있다가 3월 초에 집으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14일간 자가격리 (self-
Isolation)를 철저히 하라고 한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지키란다. 처음 들어보는 용어다. 사람들
사이에 적어도 6 피트 이상 떨어져 살란다. 그렇게 7개월째 살아가고 있다. 삶이란 너와 나의 만남에서
시작하는데 Covi19 는 만남의 자유를 빼앗아갔다. 삶의 진정한 멋은 열정을 쏟아 일을 할 때라
했는데, 하는 일감도 빼앗겼다. 죽을 때까지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만남’ 과 '일' 뿐인데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다.
어느 무료하고 한적한 오후, email 알림이 울린다. 춘식이한테서다. ‘교수님, 저 박사학위 받았어요.’ 정말
삼빡한 희소식이다. 나는 곧 부리나케 전화를 건다. “권사님 권사님, 춘식이가 박사님이 됐데요. 권사님,
축하해요, 감사드려요. 기쁘시지요?” 전화기 너머로 나도 모르게 소리 쳐 호들갑을 떤다. COVI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신선하고 청량한 소식을 전하는 이 마음, 왜 이렇게 흥이 날까…
2006년은 내가 대학을 정년퇴직 하고 연변 과기대 초빙교수로 부임하던 해다. 춘식이도 그해
일학년에 입학을 했다. 춘식이는 연변 출신 조선족 중국시민이다. 여섯 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길림성 장춘시에 있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다행이 그곳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연변과기대에
진학을 했다. 입학은 했는데 등록금을 못내 학교를 곧 떠나야한다는 소문이다. 동료 교수의 안내를 받아 내
방을 찾아왔다. 첫 대면이다. 춘식이는 한국말을 못한다. 나는 중국말을 못한다. 간신히 영어 단어를 찾아내
소통을 했다. 어렵사리 한 학기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융통해 대신 입학 수속을 해줬다.
나는 학기를 마치고는 카나다 집으로 돌아와 2개월을 쉬고 다시 다음 학기에 임지로 가곤 한다. 집에
오면 섬기는 교회 예배시간 말미에 선교 보고를 하곤 한다. 춘식이 얘기도 함께 했다. 예배가 끝난 후,
권사님 한 분이 조용히 찾아와 내게 조심스럽게 말씀하신다. “장로님, 춘식이 등록금 제게 맡겨주시면
안될까요?” 하신다. 그 권사님의 눈가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혔다. 그후 권사님은 매 학기 내가 떠날 때마다
잊지 않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흰 봉투를 4년간 내 손에 쥐여 주시곤 하셨다. 그렇게 해서 춘식이는 2010년
졸업을 하였다. 그후로 춘식이가 유학을 간다는 얘기만 얼핏 들었다. 그런데 천애의 고아 춘식이가
박사님이 됐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반도 밖에 나가 사는 우리 동포를 교포라 부른다. 그런데 유독 중국에 모여 사는 우리 동포를 우리는
조선족이라 부른다. 연변에는 조선족이 밀집해 살고 있다. 이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깊은 애환과 눈물의 사연들이 그들의 삶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엉켜있다. 배고파서 온 사람, 일본
학정에 못 견뎌 망명 온 사람, 독립군으로 싸우러 온 사람 등등---, 이유와 과정은 어떻든 그들의 후손들이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이다.
왕청이란 도시에서 2시간 남짓 산골로 들어가면 일백여 호 남짓한 태양촌이란 조선족 마을이 있다.
모두 경상북도 안동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해 산다. 그래서 이 마을을 안동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하루는
마을 노인정에서 한 할머니를 만나 사연을 들어 본다.
할머니는 가난한 소작인 집안에 태어났다고 했다. 만주에 가면 마음 놓고 부쳐 먹을 땅을 준다는 일본
사람들의 얘기만 믿고 그 지방 안동 사람들이 무더기로 만주 행을 택했다. 할머니가 일곱 살 때였다.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왔다. 인적도 드문 왕청 산골에 철조망을 둘러친 울안으로 소,돼지처럼 몰아 넣어진
채 아침, 저녁 총대를 멘 일본 군인들을 따라 들로 나가 하루 종일 땅을 파고 농사 일을 해야만 했다. 농사
진 곡식은 모두 군량미로 빼앗기고 늘 배고프게 살았다. 그렇게 일곱 살 소녀가 처녀가 됐고 어른이 됐다.
그리고 드디어 1945년 해방이 되었다. 무섭게 군림하던 일본 군인들은 모두 떠나 갔다. 그후 쏘련 해방군
로스께 군대와 토비(土匪)들의 말 못할 만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른이 돼서는 문화 혁명이란 광기와
무지의 횡포를 겪어야만 했다. 그렇게 살아 온 그 소녀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이 할머니는 마을 노인정에 나와 소일 하신다. 평생 손발이 닳도록 일을 했지만 한번도 배불리 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 뿐인가! 할머니는 이제껏 한번도 손톱을 깎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일하느라 손톱이 자랄 틈이 없었다고 했다.
“지금 식량 걱정 안 하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다 등소평 덕이지” 라고 했다. 상기된 할머니의
눈시울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혀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민족이 겪어온 수많은 애환을 이
할머니한테서 모두 보는 듯 했다.
이 할머니의 후손들이 내가 만난 연변 조선족 젊은이들이다. 생각해보면, 더 많은 ‘춘식이’를 길러
냈어야 하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연변과기대는 28년째인 올해로(2020) 마지막 학기라고 했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미운 털이 박혀서 폐교를 당한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김형석 교수는 그의 저서 ‘백세를 살고 보니’에서 “내가 있어서 누군가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인생을
아름답게 산 사람도 있었고,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어 감사하고 행복하다.”했다. 나도
그처럼 뭔가를 남기고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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