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이민 19년 차, 평범한
일상 속에서 칼날을 세우며 이웃의 마음까지 다독이는 남자가 있다. 바로 ‘밴쿠버 칼갈이’ 김우성 씨(50)다. 치열한 이민 생활 끝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지만, 그는 휴식
대신 다시 밴쿠버 곳곳을 누비는 길을 택했다. 이웃들의 무뎌진 칼을 갈아주기 위해서다. 어느덧 칼갈이로 살아온 지 2년,
장비와 재료비, 기름값 등을 빼면 수익보다 지출이 더 많은 ‘적자 세컨잡’이지만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그는 “심심한 밴쿠버 이민 생활 속에서 저를 불러주시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해요”라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캐리어 하나 들고 온 캐나다, 악착같이 버틴 19년
Q. 캐나다에는 어떤 계기로 오게 되었나요?
결혼하고 첫째 아이가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제대로 된 저녁 식사 한
끼 챙기기 힘들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어요. 그러던 중 밴쿠버에 계시던 삼촌이 그러시더라고요. ‘여기서는 어떤 일이든 열심히만 하면 저녁 식사 걱정은 안 하고 살 수 있다’고요. 그 말 한마디 믿고 2007년, 캐리어
하나 들고 무일푼으로 밴쿠버에 왔습니다.
Q. 밴쿠버 정착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영주권 따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한인 마켓에서 8년간 일하며 도전했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거든요. 두 번째 떨어지던
날, 아내랑 ‘이제 한국 돌아가자’고 짐 쌀 결심까지 했죠. 그런데 그날 밤, 잠든 큰딸이 잠꼬대로 영어로 말싸움을 하는 걸 봤어요. ‘애들이
이렇게 적응하려고 애쓰는데 부모가 포기하면 안 되겠다’ 싶어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결국 2년 뒤 영주권을 받았는데,
마트 입사 동기 중에 저만 끝까지 살아남았더라고요. 어느새 세 딸도 잘 컸고요.
Q. 영주권 취득 후에는 어떤 길을 걸어오셨나요?
한인 마켓 밖의 세상이 궁금해서 다양한 경험을 해봤습니다. 닭 공장, 조립 공장도 다녀보고 코스코(Costco)에서도 4년간 열심히 일했어요. 현재는 건물 관리 일을 본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Q. ‘칼갈이’라는
분야에는 언제 처음 눈을 뜨게 되셨나요?
마켓에서 일할 때 정육 파트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 숫돌에
칼을 갈아봤어요. 몇 분 동안 칼날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게 참 묘한 매력이 있더라고요. 당시 팀장님께서 ‘우성 씨 칼 참 잘 가네’라고 칭찬해 주셨던 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때 막연하게 ‘나중에 이걸로 작은 비즈니스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게
지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Q. 본업도 있으신데, ‘칼갈이’를 시작한 이유가 있나요?
캐나다에서 20년 가까이 치열하게 살다 보니 어느덧 적응도 하고, 내 집 마련도 하면서 나름대로의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밴쿠버 생활이 다들 그렇듯, 퇴근하고 나면 시간이 너무 무료하더라고요.
저는 골프 같은 취미도 없고 술도 즐기지 않거든요. 누가 불러주는 것도 아니고요.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하면 의미 있게 써볼까?’ 고민을 하다가, 문득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우리 지역사회의 도움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감사함을 어떤 식으로든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때 떠오른 게
예전에 정육 파트에서 칭찬받았던 ‘칼갈이’였죠. 제가 잘할 수 있는 기술로 이웃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Q. 사업 준비 과정은 어땠나요?
사업자 등록부터가 도전이었어요. 영어가 서툴러 번역기를 돌려가며 겨우
서류를 채웠죠.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처음엔
아내 반대가 심했습니다. 초기 비용도 걱정이고, 남의 비싼
칼 망가뜨리면 어떡하냐고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씩 번 돈으로 ‘보너스
용돈’을 갖다 주니 누구보다 좋아합니다.(웃음)
◇칼 한 자루에 쏟는 30분···
지루할 틈 없어요
Q. 홍보는 어떻게 하셨나요?
처음엔 무작정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어요. ‘두 자루 10달러’라는 파격 조건을 걸었는데도 아무도 문을 안 열어주시더라고요. 당시에는 의아했죠. 생각해보니 낯선 사람이 다짜고짜 문 두드리면서
칼 간다는데 누가 반기겠어요. 전략을 바꿔 명함을 만들어 꽂아두기도 하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작업을 하는
영상과 글을 올렸더니, 이제는 입소문을 듣고 먼저 연락을 주십니다.
Q. 이곳저곳을 많이 다니시겠네요.
초기엔 요령이 없어서 한 분만 연락 오셔도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제가
써리에 사는데, 단 한 분의 고객을 만나기 위해 길도 모르는 밴쿠버 웨스트까지 왕복 3시간을 다녀오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칼 가는 값보다 기름값이 두
배로 나가는 날도 허다하더라고요. 지금은 한 지역을 선정해 예약 분량을 모아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Q. 가장 높은 하루 매출은 얼마였나요?
식당 출장을 갔던 날인데, 8시간 동안 칼을 갈아 200달러를 벌었습니다. 온종일 작업하느라 몸은 녹초가 됐지만, 돌아오는 길 주머니에 든 ‘정직한 땀의 대가’를 생각하니 기분만큼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Q. 8시간이나요?
보통 한 자루당 15분에서 30분은
오롯이 집중해야 합니다. 빨리 갈 수 있는 고속 그라인더도 있지만, 그러면
열 때문에 칼의 성질이 변하고 수명이 줄어들거든요. 저는 일부러 회전수가 낮은 숫돌을 사용합니다. 천천히 열을 식히며 정성으로 갈아내야 칼날이 제대로 서고 오래가거든요.
Q. 칼 가는 작업이 지루하진 않으신가요?
전혀요. 단순해 보여도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해요. 칼마다 강도가 다르고 손님마다 원하는 각도가 제각각이거든요.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날이 서지 않아 컴플레인이 들어오고, 제가 A/S를
해드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한 자루 한 자루 극도로 몰입하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요. 무엇보다 작업 후 칼날을 보며 만족해하시는 손님들의 모습이 있으니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Q. 지난 2년간
사장님 손을 거쳐 간 칼은 얼마나 될까요?
일주일에 평균 세 번 정도 출장을 나갑니다. 운 좋은 날엔 하루에 10자루 넘게 갈기도 하죠.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2년간 1000자루는 훌쩍 넘었을 겁니다. 그 1000자루의 칼마다 담긴 손님들의 사연과 고마움을 생각하면
참 뿌듯하네요.
Q. 칼은 언제 갈아야 하나요?
많은 분이 집에 이미 연마기나 ‘야스리’ 같은 기구들을 가지고 계세요. 그런데 고객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그렇게
해도 칼이 안 든다고, 결국 안 쓰고 서랍 속에 넣어둔다고 하시더라고요. 가정용 기구들은 칼날의 각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에게 한 번 제대로 칼을 맡겨서 날을 세워두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그래야
댁에서 관리하시기도 훨씬 쉽고 칼도 더 오래 쓰실 수 있거든요. 어떤 분들은 재료가 다 잘렸는데도 도마를
힘껏 쓸거나 치는 습관이 있으신데, 그렇게 쓰면 아무리 잘 갈아드려도 하루 만에 날이 죽을 수도 있어요.
Q. 칼을 갈아야 하는 시기가 됐는지 직접 확인할 수도 있나요?
우선 첫째는 ‘손톱 테스트’입니다. 칼날을 손톱 위에 얹고 밀어봤을 때, 날이 서 있으면 미끄러지지
않아야 해요. 그런데 칼이 쭉 나간다면 날이 안 선 겁니다. 많은
분들이 칼이 안 들면 나도 모르게 힘으로 쓰게 되는데, 그러면 손목이 나갑니다. 둘째는 ‘종이 테스트’예요. 종이를 잡은 손과 가까운 곳을 칼로 잘라보세요. 종이가 안 잘린다면
날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럴 때 손톱이나 종이 위에서 칼이 미끄러진다면, 그때가 바로 칼을 갈아야 하는 시점입니다.
◇이웃들의 무뎌진 마음까지 세우며 “오늘도 칼 갈아요~”
Q. 2년 정도 이 일을 하셨는데, 수익은 좀 괜찮으신가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지난 2년을 되돌아보며 꼼꼼히 계산기를 두드려봤습니다. 기계 구입비 같은 초기 자본에 숫돌 교체비, 유류비 같은 유지비를
다 따져보니 사실상 마이너스더라고요.
Q. 수익이 마이너스인데도 계속 이 일을 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돈만 생각했다면 진작에 그만두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일에는 돈보다
훨씬 더 큰 ‘보람’과 ‘재미’가 있더라고요. 제가 밴쿠버에서 19년째
살고 있지만,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해서 불러주고 내 기술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뿌듯합니다. 단순히 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불편을
해결해드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는 게 참 좋습니다. 가끔 길에서 ‘SNS에서 본 그 칼 가는 분 아니냐’며 반갑게 알아봐 주실 때면 이 일을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즐겁고 도움받는 분들도 좋아하시니, 손익을 따지지 않게 되더라고요.
Q. 칼을 갈아드리고 나면 고객분들 반응이 어떤가요?
처음 방문하면 다들 반신반의하세요. ‘칼 가는 게 얼마나 차이가 있겠어?’ 하는 눈빛으로 지켜보시죠. 하지만 정성껏 날을 세운 칼을 하나
딱 건네드리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그걸 들고 주방에 가셔서 재료를 썰어보시고는, 표정부터 달라져서 나오시거든요. ‘어머, 진짜 다르네!’ 하시며 저를 보는 눈빛이 바뀌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짜릿함은 말로 다 못 합니다. 돈을 떠나서 그 맛에 이 일을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Q. 2년 동안 출장을 다니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많은 분의 칼을 갈아드리면서 ‘우리 한국 분들이 참 정이 많구나’라는 걸 깊이 느껴요. 제가 열심히 일하는 게 고마우셨는지, 어떤 분은 칼 가는 비용만큼 팁을 더 얹어주시기도 하고요. 뒤뜰에서
직접 재배하신 채소들을 한 보따리 싸주시는 건 예사고, 식사를 차려주시는 분들도 있으세요. 그런 따뜻한 마음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 일이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나누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Q. 기억에 남는 특별한 손님이 있을 것 같아요.
한 25년이 된 칼을 들고 오신 고객님이 기억나요. 시집올 때 친정엄마가 주신 칼인데, 너무 무뎌져서 버릴까 고민하다가
가져오셨대요. 제가 정성껏 갈아드리니 다시 새것처럼 된 칼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시더라고요. 그때 느꼈죠. ‘아, 내가
단순히 칼만 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추억을 다시 연결해 드리고 있구나’ 하고요.
Q. 봉사활동도 하신다고 들었어요.
꾸준히 하는 일이라기엔 아직 쑥스럽지만, 지난 여름 뉴비스타 한인
양로원 기금 마련 바자회에 참여했습니다. 제 기술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먼저 연락을 드렸더니
주최 측에서 흔쾌히 환영해 주시더라고요. 그날 현장에서 칼을 갈아드리고 받은 수익금 중 일부를 기부했는데, 금액의 크기를 떠나 제 손길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참 뿌듯했습니다.
내년에도 꼭 불러달라고 말씀드리고 왔어요.
Q. 최근에는 정착자분들을 위한 무료 나눔 공약을 하셨죠.
밴쿠버에 새로 정착하며 우여곡절을 겪는 분들의 글을 보니 17년 전
제 모습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신규 정착자분들께는 무료로
칼을 갈아드리겠다’고 커뮤니티에 공약을 올렸죠. 사실 연락이
너무 많이 오면 어쩌나 싶어 살짝 손이 떨리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딱 한 분만 연락을 주셨어요. 우리 한인분들이 참 마음이 따뜻하신 게, ‘나 정착한 지 얼마 안
됐으니 공짜로 해달라’고 먼저 말씀하시는 분이 단 한 분도 안 계세요.
Q. 캐나다 정착 선배로서 후배 분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솔직히 이민자 삶, 절대 만만치 않아요. 얼마 전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니 기본급 수준인데도 영어가 서툰 이민자에겐 진입 장벽이 너무 높더라고요. 현실이 참 녹록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
살며 가장 잘한 일이 바로 ‘칼갈이’예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밴쿠버 삶에서 이게 제게는 큰 낙이자 행복입니다. 사실
기반이 없으면 사람 만나기도 위축되는데, 이 일을 하니 사람들이 저를 찾아주고 ‘고맙다’며 밥도 차려주세요. 만족해하시는
손님들을 보며 느끼는 보람이 정말 큽니다. 그래서 여유가 생긴다면, 소자본이라도
꼭 자기 일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칼을 갈아도 좋고, 저는
언제든 제 기술을 가르쳐 드릴 수 있어요. 내 기술로 ‘사장님’ 소리 들으며 일하는 자부심이 삶을 정말 당당하게 만들어 주더라고요.
손상호 기자 ssh@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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