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내 기억 속 최고의 어이없던 순간

줄리아 헤븐 김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4-03-04 13:00

줄리아 헤븐 김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2024년으로 끝자리 숫자 하나가 바뀌며 엄청나게 쏟아지던 카톡의 홍수가 사라질 무렵에 나는 재미있는 톡 하나를 받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는 톡이 아닌 새롭게 단장한 문인협회 산문 분과의 새 방장님이 쏘아 올린 첫 신호탄으로 그것은 푸른 용의 꿈틀거림처럼 잔잔하던 방안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린 왕자’의 여우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신세대 방장님의 기발한 인사말과 함께 산문 방 한정 초미니 백일장을 제의했다. 주제는 ‘내 기억 속 최고의 웃겼던 순간’으로 분량 제한도 없고 짧든 길든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기한은 사흘 후 1월 7일 저녁 7시까지라며 참가 작품 중 세 편을 투표로 선정해서 이모티콘을 방장님 자비로 선물하겠다는 미끼도 던져 놓았다. 때마침 지인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방장님의 제안을 보게 되었는데, ‘내 기억 속 최고의 어이가 없었던 순간’이 전광석화처럼 번쩍이며 내 머릿속을 비집고 나오는 것이었다. 주제는 웃겼던 순간인데 나는 왜 어이가 없었던 순간이 눈앞에 나타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 최고로 어이가 없었던 순간은 탁 떠오르는데… 어쩌면 그것도 웃겼던 순간이 될 수도 있겠다 싶네요. 하지만 출품할지는…”라고 답글을 달았다. 그러자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헛웃음 나왔던 에피소드도 괜찮다는 방장님의 위로 성 격려와 독려의 답변이 올라왔다. 내심 상품으로 걸린 이모티콘이 무척 탐이 나긴 했지만, 백일장 의도를 어림짐작했기에 내 이야긴 주제에 걸맞지 않아 애당초 출품할 마음은 갖지 않았다. 그 대신 남들이 겪은 웃겼던 순간을 터져 나오는 박장대소로 웃음 순위를 매겨 보았다. 스페셜 안과 의사 선생님과 통성명을 나누며 웃음을 참아야 했던 순간으로 포문이 열리자, 하나둘 자기에게 웃겼던 사연은 쉽게 웃음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Dr. Bhangu (방구) 라는 인도분의 이름을 듣는 순간 한국 사람이라면 저절로 헉! 날숨에 섞여 튀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누르며 표정 관리까지 해야 했을 그 상황이 연상되어 웃음을 자아냈다. 불어로 참치가 thon 참치샌드위치를 똥 샌드위치라는, 잘 닫히지 않는 문에 끼우라는 고무장갑을 받아서 손에 끼고 열리는 문을 부여잡고 용변을 보려 했다는 화장실 이야기며 또 복권을 통한 에피소드까지 연이어지는 웃음에 급기야 방장님은 즐거움을 나눠 주신 모두에게 이모티콘을 선물했다. 다양하고 재치가 넘치는 이모티콘의 그림과 문구는 신세대 방장님의 센스가 여과 없이 발휘되어, 또 다른 재미와 즐거움을 주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기억 속 최고의 웃겼던 순간을 함께 웃음으로 나누며 내 기억 속 최고의 어이없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방장님의 이야기처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라도 나왔나? 끓어오르는 부화를 참느라 억지로 미소를 지었던 것 같기도 한 희미한 내 감정을 들추어 보았다. 희한한 것은 환갑을 넘긴 지금의 내가 그때의 순간을 떠올리니 내 기억 속 최고의 어이가 없던 순간이 최고의 웃겼던 순간으로 바뀌어 있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흘러간 사십여 년의 시간 안에 담겼던 민망하고 좋지 않던 기억은 입꼬리마저 춤을 추게 하면서 분노는 용서로 용서는 웃음으로 변해 있는 것을 그동안 단 한 번도 들춰낸 적이 없었기에 전혀 알지 못했다.
 
대학 졸업반으로 무척 분주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선다회’라는 대학 연합 서클인 다도 모임에서 만난 A라는 남학생을 몇 해 동안 마음에 품고 지냈는데 그것을 안 서클의 B 남학생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징검다리를 자청하고 나섰다.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학창 시절에 남학생들과 말도 잘 나누지 않고 은근히 수줍음도 타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남학생 앞에서는 좋아하는 티를 전혀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소위 짝사랑만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면 믿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보기에 따라 콧대가 세 보일 것도 같지만 실상 부끄러워서 나를 방어하기 위해 새침하고 조금 건방진 듯한 태도를 취했던 것일 뿐 쑥스러워서 같은 학과 남학생들이 아니면 거의 눈길도 말도 건네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화장기가 없는데도 마른 몸매에 이목구비가 컸던 탓에 외향이 화려하게 보이는지 용기 있는 남학생 아니면 선뜻 내게 말을 거는 남학생도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가 생각보다 참하고 괜찮은 여학생이라고 입소문이 나서 나를 좋아하는 남학생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착각은 자유라 하니 이럴 때 한번 나도 자유롭게 착각의 늪에 빠져 본다. 어찌 되었든 학년이 올라갈수록 신입 때의 반짝인기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도 내가 좋아하는 남학생은 내게 대시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누구를 만나고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 역시 들려오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눈길을 의식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면 다정하게 바라보는 A가 늘 있었다. 그런 A의 모습에 심쿵하고 더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상상 속에서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커져만 갔다. 어쩌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눈길을 피했고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미대생답게 석양에 물들어가는 저녁노을로 내 얼굴에 그려 놓곤 했다. 그렇게 A와 나는 초등학생이나 하는 풋사랑과 같은 사랑을 3년이 넘어가도록 남몰래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 농담도 잘하고 리더의 역할도 잘하는 B 군이 나서서 A 군을 다리 놔주겠다며 은밀하게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내가 말없이 윗니를 드러내자, 시간과 장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되었고 청바지만 즐겨 입던 평소와 달리 단아하게 하얀 레이스 옷깃이 달린 짙은 군청색 원피스를 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종로 2가 커피향이 짙은 ‘준’ 커피숍 2층에 B가 먼저 와서 밝고 호탕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스커트를 입으니 다른 사람 같다는 둥 오드리 헵번 같다는 둥 말도 안 되는 감언이설로 칭찬 일색을 늘어놓던 B는 A가 오는지 내려가서 데리고 오겠다며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A를 의식하고 있는 내 표정이 숨겨지지 않았기에 입장이 난처해서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설렘으로 가득 차오르는 지난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던 A의 눈길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열두 살 소녀의 첫사랑처럼 그저 그 느낌이 참 좋았다.
 
B가 내려간 지 십 분 정도 되었을까? 앞가르마의 허연 이마 아래로 눈 코 입이 보이며 이내 B의 상체가 계단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다란 다리까지 다 보인 뒤에도 그는 혼자였다. 실망이 수치심으로 온몸을 후비는 그 순간에 들려오는 비장한 B의 음성. “오늘 A는 안 와! 내가 나를 너에게 소개하는 자리야.” 이 한마디는 내 인생 최고의 어이없던 순간으로 온몸에 재봉틀이 다르르르륵 박음질하는 것처럼 분노가 박히는 순간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A군에게 말했다는 B의 고백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고 짜증이 나던지…. 친구가 좋아하는 여학생을 바라만 보아야 했을 A의 마음.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룰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던 거였다. 나는 선다회 동아리도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좋아하던 작설차의 은은한 향조차 화를 자아내어 한동안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산문 분과 방장님이 내건 초미니 백일장으로 인해 사십 년이 지나서 ‘내 기억 속 최고의 어이없던 순간’이 이제는 ‘내 기억 속 최고의 웃겼던 순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내가 에베소서 4장 26절의 성경 구절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는 말씀을 일찍 깨우쳤다면 분노로 기억을 송두리째 꽁꽁 싸매어 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내 기억 속 최고의 웃겼던 순간으로 바로 즉시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방장님이 던진 이모티콘을 덥석 물었을 것 같다. 이렇게 좋지 않은 기억도 시간에 휩쓸리면 왜곡이 아닌 그리운 추억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그날의 추억을 웃음으로 반추해 본다.
 
-2024년 2월 9일 즐거운 추억이 되어버린 그날을 떠올리며…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일하며 생각하며 2023.10.16 (월)
  나는 흙 내음이 좋아서 농촌에 산다. 값도 안 나가는 토종사과를 가꾸며 이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자연의 아낙으로 살며 글을 쓴다.어떤 이는 이런 나를 신선이라 부러워하고 어떤 이는 못난이라 비양을 한다.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시멘트 정글속에 갇혀 마음의 고향인 흙을 그리며 사는 도시인들이고 후자는 도시로만 나가면 뼈 빠지게 일 안하고 편히 살 수 있다고 그곳을 동경하는 가난하고 순박한 내 이웃들이다.나는 그 틈에서 머리는...
반숙자
자화상 2023.10.16 (월)
어느 시절은 봄꽃처럼 환하게 웃다가 어느 시절은 슬픔을 바늘귀에 꿰어 하루를 깁고 어느 시절은 무디어진 마음 바람에 벼리며 산 이제 바람에 닳은 얼굴 반쯤 뭉그러져붉은 꽃잎 같던 입술은 어디로 가고칸나 혹은 장미꽃 빛 립스틱이라도 발라야그나마 생기 도는 얼굴 봐 줄만한 입술 위에 꽃 피워 놓고얼굴 가만 들여다보니살고살아내고살아 지기도 한 온갖 시절그래, 노래였구나꽃이었구나사랑이었구나 담담한 눈빛이 나를...
정금자
산(7) 2023.10.11 (수)
가을산은 엄청난 생명력을 지녀옅은 파아란 녹조의 빛깔의 *대추(棗)는끝내 익어 임금님의 용포를 담은 듯붉은 색을 띄워 끊임없는생성과 소멸의 혼백에게다음 세계를 염원한다 가을산은 신비한 생명력을 지녀*사신 처럼 한 톨의 씨 밤이 썩어져내세에 *밤(栗)의 열매를 열듯산아 너는 신비한 마법으로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를연결하여 영원한 생명을 띄우는구나 가을산은 유치찬란한 생명력을 지녀*오행의 조화로 황금빛 만추의...
구정동
숨고르기 2023.10.11 (수)
  누렇게 뜬 무청이 눈에 띈다. 괜히 억척을 부렸나 보다. 어제 다용도실에 놓아두고 늦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깜박하고 반나절이나 지난 지금 생각난 것이다.  성당 후문에는 일요일에만 오는 야채 트럭이 있다. 밭에서 직접 따온 신선한 야채에 늘 마음이 끌렸지만, 오후에 약속이 있거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기에 한 번도 사본 적은 없었다. 어제 미사를 끝내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미사 후 부부 동반 모임이...
민정희
아침 안개 2023.10.11 (수)
  그는 거물이야 하늘과 바다를 합방시키고 밤과 낮의 경계를 허물지 사람이 만든 구획을 지우고신의 업적조차 무화시켜 버려 논둑이며 밭고랑을 후루룩 삼키고 강물을 통째로 들이마시는 그는미처 씹지 못한 봉우리 하나 허공에 둥실 뱉어 놓기도 해그는 고단수야 숨소리도 없이 진군해 와서 오랏줄도 없이 포박해 버리거든 품어 안는 척 발을 묶는사랑법이 내가 알던 누구와 기막히게 닮았어 겹겹이 진을 치고 포위해보아도 끝내 네 안으로...
최민자
     느긋하고 넉넉한 곳에 앉아 있으니     흐르는 시간도 늦은 걸음을 걷고     너울거리는 바람도 포도 넝쿨 사이로     시간을 몰아 마실 하듯 흐르는구려      너른 하늘과 땅을 쪼개고 가른 뒤     사람을 불러모아 도시는 살아가고     갇혀 살아가는 자고 깨는 반복은     우리 등을 떠 밀어 산과 물가로 내 몬다      톱과 망치로 손은 한가 할...
조규남
비늘 2023.10.04 (수)
옆구리를 만지면안녕의 감탄어를 뱉는다물 압력과 지그재그 가르려는 저항공기를 모방한 심호흡은 늘 얼떨떨했다 짧고 굵은 생식의 모범이제대로 된 세상에서물고기가 책장을 가로지르는 방법이다하도급 체계에 익숙한 먹이사슬을요리조리 제대로 비껴가기 위해뜸한 머무름이생식의 안갯속을저녁처럼 깜박이지 눈앞과 눈 뒤에 달린 얼떨떨한 앨범 사진이랄 게술래의 눈가리개로나무에 눈 붙이고 열을 세다뒤틀린 명암만 비늘에 살짝...
김경래
올봄에 백내장 수술까지 하고 나니 릴레이 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병치레에서 비로소 벗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육십 해 동안 사용한 몸은 재정비라도 필요했는지 여러 병원을 드나들며 마치 종합병원 투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시작은 2021년 11월 말이었다. 그날은 자정이 다 되어 가던 시각에 샤워하게 되어서 나름 평소보다 물소리와 주위에 신경을 쓰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디샴푸를 바르며 한 발을 살짝 들고 발가락을 닦으려던 순간, 그때까지 한...
예함 줄리아 헤븐 김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