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엄마의 힘

권은경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11-27 11:12

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하루에도 몇 번을 오가는 거리가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의 모습 속에서, 외국어로 채워진 상가 외벽의 간판을 보며 나는 누구이고, 내가 있는 곳은 어디 인지를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자메뷰(Jamais Vu), 즉 미시감(未視感) 현상을 말하는 걸까? 익숙한 장소가 낯설게 느껴지면 재빨리 눈을 감거나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이국의 정취에 스며들지 못하는 나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가볍고, 흐리며, 형태가 없다. 어쩌면 그러기에 방향 없이 표류 하며 더 자유롭게 삶을 여행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늘 그리워하던 엄마가 여행자가 되어 딸을 보러 오셨다. 생각 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고, 나지막이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름, 엄마! 신이 나약한 인간에게 준 고귀한 선물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내 마음은 늘 엄마에게 달려간다. 환하게 웃으며 허기진 자식을 품에 안는 엄마를 떠올릴 때면 갓 지은 밥 냄새가 난다. 그리움이 깊으면 흐르는 물도 몸을 얼려 멈춰 선다고 했던가? 길 위에 멈춰 서 바라보는 세상은 늘 생경했다. 


기다림 끝에 만난 엄마는 꿈같이 찾아와 대지를 깨우는 봄 볕 만큼이나 신비롭다. 그저 엄마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산책하고, 장을 보는 평범한 순간들이 권태로웠던 생활에 신선한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차마 전하지 못하고 우수의 심연 속에 묻어두었던 감정들을 꺼내 엄마 앞에 풀어놓으니 갑갑했던 마음도 후련해졌다. 이해 받기 위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진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마냥 감사했다.


나는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가 차려낸 밥상 앞에서 그동안 굶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거 아닌 일로도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익숙해질 법도 한 공간이 한없이 낯설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엄마에게 붙어 공급 받던 이해와 애정의 결핍이 삶의 순간들을 굴절 시켜 왜곡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엄마로 인해 나의 세상은 따뜻해지고, 생기를 되찾았다. 오래도록 눈에 설어 멈춰 서야만 했던 공간 들이 엄마와 있으면 마음속에 간직한 정든 곳에 와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존재 만으로도 얼마나 소중하고 강력한가? 늙고 병들어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엄마는 여전히 생명을 먹이고, 살리며, 삶을 긍정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 존재의 무게와 가치를 알기에 온 맘으로 아껴주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과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기만 했다. 엄마와 사 온 소형 종 장미가 꽃망울을 터뜨리며 앙증맞은 연 분홍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은은하게 스며드는 행복감에 기분이 좋아진다. 꽃에 물을 주며 엄마의 노년이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고 아름답기를, 나의 삶이 받은 사랑을 거름 삼아 인생의 가을과 겨울에도 꽃 피울 수 있기를 기도한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창 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반갑다. 해가 길어지고, 따뜻한 봄 기운이 느껴지는 요즘, 서서히 생활에 작은 변화들이 생기고 있다. 낯선 새소리에 창문을 열고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목을 길게 빼본다. 머리 위에 뾰족한 부채를 단 레드 카디널인지, 푸른 깃털이 매력적인 블루 제이인지, 귀여움을 뽐내는 워블러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다가올 계절을 품고 자연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존재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권은경
삶을 위한 사유 2024.02.26 (월)
 시간이 흐를수록 삶이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과정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 쉽게 넘어지고, 상처 받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누구나 늙고, 병들며 결국 죽음에 직면한다. 종종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한 실존 적 두려움을 피해보려 하지만, 매스컴을 통해 매일 아침 인류의 고통을 새롭게 마주할 뿐이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고통과 재난을 등지고 서서 어떻게 하면 이 존재의 한계와 가혹한 현실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권은경
엄마의 힘 2023.11.27 (월)
   하루에도 몇 번을 오가는 거리가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의 모습 속에서, 외국어로 채워진 상가 외벽의 간판을 보며 나는 누구이고, 내가 있는 곳은 어디 인지를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자메뷰(Jamais Vu), 즉 미시감(未視感) 현상을 말하는 걸까? 익숙한 장소가 낯설게 느껴지면 재빨리 눈을 감거나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이국의 정취에 스며들지 못하는 나는 공기 중에...
권은경
 작년 9월에 주문했던 차가 일주일 내로 나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팬데믹으로 반도체 공급 난이 심해지면서, 신차 출고가 일 년씩 미뤄진 상태였는데 생각보다 빨리 새 차를 받게 되었다. 자동차 딜러는 운이 좋아 주문한 차가 빨리 나왔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십 년을 함께한 노후한 차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살아있지 않은 대상에게서 생명체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권은경
   거대한 돈의 위력을 등에 업고 세상의 부조리는 날로 커지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우리 삶의 고유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런데도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서 여전히 우리의 삶과 사회 속에는 돈으로 가치를 측정하고 거래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며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옳은 말이지만 사랑도 우정도 돈이 있어야 표현할 수...
권은경
꿈꾸는 집 2022.11.21 (월)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가 끝나면 종종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가곤 했다. 시장 어귀에 자리 잡은 떡볶이집은 허름한 건물 일 층에 있었다. 주문한 떡볶이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페인트칠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누추한 벽에 삐딱하게 걸린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 사장님이 직접 쓰신 산문시였다. 고생 끝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곤히 잠든 식구들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겨 쓴 가슴 뭉클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인간의...
권은경
초여름의 어느 날 2022.07.11 (월)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사정 없이 흔들렸고, 그 중심권에서 겨우 벗어나 한숨을 돌리나 싶은데 일상이 무겁고, 권태롭다. 힘을 주고, 눈을 크게 떠봐도 때로 눈꺼풀은 천근 만근 무겁고, 시야는 흐려진다. 어떤 일에 깊이 몰두하다 보면 기력이 소진되어 무기력증에 빠지기도 한다더니 지금이 그때인 것만 같다. 살면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간절했던 순간들…. 하루도 허투루 살면 안 된다는 강박에 빠져 나를 몰아세웠지만, 뜻대로 흘러가지...
권은경
새로운 길 2022.02.14 (월)
언제부터인가 지나갈 거라고 믿으며 견뎌온 코로나 사태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처럼 느껴졌다. 감당해야 할 고통과 책임은 커져만 가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람들은 보랏빛 희망과 검붉은 절망 사이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는 듯 보였다.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처절하고 눈물겨웠다. 전염병의 창궐이 가져온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우리는 지독한 고립과 무력감에 빠진 건 아닐까? 해가 바뀌면 좀...
권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