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지난 여름. 마치 홍역을 치르고 난 아이처럼 휘청거리는 다리로 과수원을 한 바퀴 돌았다. 아침 이슬이 파랗게 내린 풀 섶은 영롱한 구슬이 구을고 엊그제 씨를 넣은 열무 밭엔 씨를 물린 열무 잎이 속속 솟아나고 있다. 내가 아팠던 며칠, 상치는 냉큼 커서 꽃망울을 줄줄이 달고 섰고 땅을 기던 호박 넝쿨은 어느새 기어 올라 아카시아 나무 기둥을 칭칭 감았다.
가슴을 활짝 편다. 기지개를 켠다. 푸성귀 냄새 같은 바람이다. 달그므레한 젖 내 같은 바람이다. 피부 깊숙이 와 닿는 새벽의 맑은 공기에 몸살기가 가시는 듯하다. 미루나무 상수리에 까치 한 마리가 둥지를 트는지 바쁘다. 깍깍 짖는다.
반가운 소식이 오려나. 우리집의 여름 아침은 이렇게 열린다. 쌀을 안쳐 스위치를 넣고 큼 밭을 한 바퀴 돌아오면 바지 가랭이는 이슬에 젖어 후줄그레 하지만 시장 바구니에 든 아침 찬거리는 싱싱하다. 연하디 연한 봄 배추 한 다발, 야들야들한 아욱 한 모숨, 파 서너 뿌리, 당근 한 개, 파는 이도 나요 사는 이도 나 혼자이니까 내 맘대로인 채소 전. 봄이면 냉이가 지천이고 달래는 양지 쪽에 남 먼저 돋는다. 철철이 도라지, 우엉, 가지, 오이 업는 것 없이 성시인 우리 집 텃밭.
그래서 나는 가난한 부자임을 자처한다. 누구라도 찾아오면 그저 반가워 손잡는 마음, 푸성귀라도 나눠 주어야 마음 놓이는 촌부, 내가 남에게 줄 것이 하나라도 있을 때는 나는 가난뱅이가 아니다. 가난뱅이가 웬 말씀, 아흔 아홉 섬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자 넘보는 그게 아니고 한 섬 있어도 이웃과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 조각 있으면 그게 부자다. 나는 부자다. 모두 하느님께 공짜로 받았으니 나도 공짜로 나눠 갖고 기쁨을 나누면 은혜는 몇 곱절로 커져서 우리는 따뜻해 진다. 다만 위선 없는 가난한 부자이기를 바라고 노력하며 산다.
조석으로 매달려 가꿔온 내가 있어 무럭무럭 자라는 줄 알았지만 내가 몸살로 누워 있는 그 동안 이네들은 더 푸르고 싱싱하게 크지 않았는가. 내 손길이 아니라도 더 신실한 손길이 이들을 기르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존재를 실감시켜 준다.
어느새 오이 싹은 덩굴 속에 손 길이만 한 오이 한 개를 뉘어 놓고 싱글 벙글 웃으며 덕으로 올라간다. 나는 소중한 보물을 따듯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기도 한다. 첫 열매에 대한 애착과 보람은 유다르다. 그래서 나는 내 밭에 열리는 첫 열매를 딸 때마다 엄숙해지고 가슴 두근거리는 환희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연과 함께 그 일부가 되어 생활하다 보면 참으로 오묘한 섭리에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온 밭에 제멋대로 피었다가 지는 작은 풀꽃 한 송이도 하는님의 축복을 찬미하는 천사인 것을 알게 된다.
나처럼 부족한 인간도 드물 것이다. 언젠가 언니에게 드리는 편지에 이런 말을 했다. “작은 것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시로 느끼며 묵상에 잠기면 현세의 나는 귀머거리요, 부끄러운 에미요, 칠칠치 못한 여인이지만 거기 천상의 나라에서는 가장 가까이서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보고 살 수 있는 착한 영혼이기를 열망해요”
정말로 나는 보청기를 가슴에 매달고 살아가는 결함 투성이 인간이다. 80Db의 청력을 잃고서 정상인들 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는 일은 참으로 힘겹고 고달프다. 보청기의 볼륨은 나날이 높아 가고 음계는 한 옥타브씩 하강한다. 고음 상실증의 청력 마비, 그래서 왕왕거리는 보청기를 사랑의 인장처럼 가슴에 달고 풍진 세상을 건너가는 나. 세상살이가 힘에 겨울 때 나는 묵묵히 십자가 앞에 꿇어 앉는다. 내가 드릴 말씀도 잊은 채, 그렇게 한없이 수난 당하시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은 참회의 아픔으로 갈갈이 찢긴다. 나의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래서 나의 위로는 십자가 뿐이요 나의 희망도 십자가의 부활 뿐이다.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인 음악에 나를 첨벙 담그고 누우면 소리 없이 오시는 그분의 발소리가 가슴에 새겨지고 그분이 다녀가신 자리엔 언제나 넘치는 평화가 고여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불행에도 실망하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노동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 이상 가는 기쁨이란 세상에 다시 없다는 어느 분의 말에 공감한다. 오늘도 나는 고달픈 일과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며. “누운 즉 마음 편하고 단 잠에 잠기오니 야훼여, 내가 이렇듯 안심하는 것은 다만 당신 덕이 옵니다”.(시편 4;8)
감사의 기도로 하루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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