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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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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2-07-11 09:40

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사정 없이 흔들렸고, 그 중심권에서 겨우 벗어나 한숨을 돌리나 싶은데 일상이 무겁고, 권태롭다. 힘을 주고, 눈을 크게 떠봐도 때로 눈꺼풀은 천근 만근 무겁고, 시야는 흐려진다. 어떤 일에 깊이 몰두하다 보면 기력이 소진되어 무기력증에 빠지기도 한다더니 지금이 그때인 것만 같다. 살면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간절했던 순간들…. 하루도 허투루 살면 안 된다는 강박에 빠져 나를 몰아세웠지만,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과 정면으로 맞닥뜨릴 때면 멈춰 서야 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긍정의 힘을 끌어모아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흘러넘치던 감정의 물길이 바짝 말라버린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은 간절히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부질없는 환상에 이끌려 삶의 궁극적 가치를 외면했던 건 아니었을까? 인간의 계획과 노력이라는 게 무엇을 성취하는데 얼마 만큼의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좋아하던 음악을 들어도 마음이 동요 되지 않는 날, 책을 펼쳐도 의미 없는 활자만이 사방으로 흩어져 한 단어조차 잡을 수 없을 때, 말과 표정을 잃고 일상의 피로에 떠밀려 일터로 가는 나는 회색 구름이었다. 햇볕이 좋은 초여름은 초록의 싱그러움을 품고 눈부시게 빛나는데 내 마음으로는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멍한 상태로 익숙한 길을 달려갔다. 기계적으로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서 신호에 걸리지 않으려면 속도를 내서 재빠르게 돌아가야 하는 사거리에 다다랐다. 그때, 나는 브레이크를 밟고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멈춰 서야만 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정지된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 그저 상황이 종료 되기 만을 기다리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한낮의 뜨거운 기운이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 올 때 비로소 계절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이 지나갔구나. 잊고 있던 노란색의 감동이 순간 살아났다. 어미 오리의 뒤를 쫓아 다섯 마리의 새끼 오리들이 줄지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복잡한 사거리에 발을 들여놓으며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던 어미 오리는 꿋꿋하게 방향을 잡고 새끼들을 이끌었다. 신호등의 불이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뀌었지만 작고 여린 생명의 몸짓을 응원하며 그 누구도 속도를 내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운전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흐르고 서로 눈을 맞추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주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인데 많은 것이 달라진 듯했다. 오리 가족이 길을 무사히 건너 차도 옆 풀숲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다시 갈 길로 나올 수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노란색 솜털이 보송보송 올라온 새끼 오리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한참 아른거렸다.
  
  살면서 공들여 세운 계획이 수포가 되어 실망스러웠던 순간은 적지 않았다. 타의에 의해서 건 자의에 의해서 건 삶의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서야 할 때면 아팠다. 고난을 극복하고, 쉬어 갈 때 주어지는 인생의 참 맛과 지혜 따위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인간의 힘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는 우회하는 법을 배웠다. 겨울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폭풍이 지나고 나면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멈춰선 시간, 내가 갖고자 했던 그 무엇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누려왔던 것들에 눈을 돌리고 감사할 수 있었다. 겁 없이 차도를 건너던 오리 가족은 내가 닿고자 했던 목적지의 도착 시간을 늦추었지만, 삶의 권태로 경직된 마음을 유연하게 해 주었다.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영원히 살 것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면 나는 나 답게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쏟아지는 초여름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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