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오은 / 캐나다 한국문협 기획이사
나는 비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외출했다가 빗방울이 떨어지면 100미터 달리기로 집으로 향했고 친구와 약속을 했다가도 비가
오면 나가지 않을 핑계 찾기에 머리를 굴리곤 했다. 서점에서 할인 판매하는 날만 기다리다 억수로
내리는 장대 빗 속에 포기하고 일년 내내 후회하기도 했다.
장마철도 아닌데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 논리와 언어의 유희가 읽고
또 읽어도 멀어만 가는데 날씨마저 우울했다. 습기 닿는 것조차 싫어 비 오는 날은 꼼짝도 안
하는데 그 날은 갑자가 외출이 하고 싶어 졌다. 장대비가 내리 퍼붓다가 좀 가늘어 졌기에 집 근처
광화문 쪽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수업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빗속에 나서는 걸 극도로 꺼리던
내가 갑자기 뭔가에 홀리듯 빗속을 걸어보고 싶었다. 비를 무조건 피할 게 아니라 즐겨 보자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미로운
상상을 하며 걸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 기분이 예전 하고는 달랐다. 빗 방물이 땅에 떨어졌다 튕겨 오르는 소리가
경쾌하고 자작자작 밟히는 부츠의 마찰음도 좋았다. 비를 막아주는 우산 속의 작은 공간은 숨겨진
이야기를 종알거리며 들려주는 듯했다. 반복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리듬은 고저의 장단을
맞추는 경쾌한 북소리 같았다. 무언가 알지 못했던 막혔던 것이 탁 트이고 머릿속이 명료해지는
기분이었다. 비는 어느새 나와 한 몸이 되어 보조를 맞추고 오히려 아늑함마저 주는 것이 아닌가.
아, 그래서 내 친구는 비 오는 날을 그렇게 좋아하는구나.
비는 이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홀가분한 자유스러움을 주는 경이로운 존재로까지 다가왔다.
코끝에 걸리는 비릿한 페이브먼트의 냄새조차도 상큼했다. 비를 툭툭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통쾌하기까지 했다. 나를 의심할 정도였다. 비란 존재도 이렇게 함께 갈 수 있는 거구나.
이기지 못할 바에는 친구가 되라더니. 비 또한 예외가 아님을 그 때부터 터득했다고나 할까.
영화 <남과 여>에서 아내가 자살하여 혼자가 된 카레이서 장(Jang)과 남편을 잃은 시나리오 작가
안느(Anne)가 해변도시 도빌의 기숙사에서 우연히 만난다. 파리 행 열차를 놓친 안느가 장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같은 비가 내린다. 세상을 버린 장의 아내와 남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느, 둘은 애틋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상념에 잠긴다. 단순하게 반복되지만 감미로운 저음의 듀엣
곡과 창 밖의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둘의 사랑을 예고한다. 비는 우연한 만남 마저도 감상적인
이야기로 엮어주고 예기치 않은 사랑마저 가져다주는 어떤 페이소스가 있다.
그토록 꺼리던 예전의 비를 작별하고 또 다른 느낌의 비를 이곳 밴쿠버에서 맞는다. 늦가을부터
봄까지 속절없이 내리는 비는 서울의 우레비나 *작달비하고는 다르다. 장대비가 한바탕 쏟아지면
속내를 시원하게 풀어 줄진 모르지만 가혹한 장대비를 사랑할 수는 없다. 이곳의 비는 오는 듯
마는 듯 쉬엄쉬엄 내리고 스멀스멀 옷을 적신다. *는개되어 뽀오얗게 내리기도 하고 실 같은 비가
친구처럼 내리기도 한다. 땅 위에 먼지를 잠재우듯 *먼지잼도 간혹 내린다. 이렇게 조용히 내리는
가녀린 비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랴. 사람들은 *비꽃이 떨어져도 부산하게 움직이지 않고 굳이
우산을 찾지도 않는다. 비 오면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치면 벗으면 그만이다.
이곳은 우기雨期임에도 가끔 다이아몬드같이 반짝이는 햇살을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 모두들 해
바라기 하러 해변이나 공원을 찾는다. 한여름에도 습기가 없고 한국의 가을같이 드높은 하늘과
맑고 뜨거운 날씨가 계속되어 가끔은 비가 그리울 때가 있다. 대지가 메마르고 가슴이 숨차 할
때는 보송한 잔디 위에 제법 굵은 빗줄기가 보고 싶다. 그러나 한여름에도 겨울에도 세찬 빗줄기
보다는 손님처럼 *해비가 다녀 간다.
나붓이 비 내리는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고 왔다. 휴일임에도 비가 와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으니 공원은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연못 속의 오리들이 물에서 비를 맞고 노는 듯 자는
듯 유유히 떠 있다. 오리가 물속에서 조용히 비를 즐기는지 몰랐다. 모두가 참선을 하듯 머리를
몸에 가두고 미동도 없이 떠 있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같은 비 일지라도 어제의 비가 아닌 이곳에서의 비는 그리움을 불러오고 누구나 시인이 되게
한다. 나는 이제 비를 피하지도 탓 하지도 않고 친구처럼 함께 가기로 했다. 너그러운 마음이 된
걸까. 안개 속에 나를 잠재우듯 무아無我에 이른 것일까.
<비에 관한 순 우리말>
*작달비 : 굵고 세차게 퍼 붓는 비
*는개 :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먼지잼 : 먼지나 잠재울 정도로 아주 조금 내리는 비
*비꽃 : 한 방울 한 방울 비가 시작될 때 몇 방울 떨어지는 비
*해비 : 한쪽에서는 해가 비치면서 내리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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