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사과나무 한 그루가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갑자기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나무는 작고 발그레한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는데,
미처 가을이 끝나기도 전에 까치밥 하나 없이 마른 가지 뿐입니다. 사과는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수풀 가에 서 있던 키 큰 삼나무 밑동까지 잘려 나간 뒤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습니다. 수풀에 자리해 쉽게 드러나지 않던 야생
사과나무입니다. 가지에 매달려 노라발갛게 익어가는 사과 얘기는 갈바람 타고 삽시간
소문으로 퍼졌겠지요. 어린 시절 기억처럼 아련아련 피어나던 야생의 붉은 열매, 사과는
누가 다 따 먹어버린 것일까요.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 방학이 시작되면 마음은 늘 몸보다 더 빨리 외갓집으로
향했습니다. 읍내 5일 장을 보러 나온 외할머니 손을 잡고 산골 마을로 향하는 발걸음은
꿈길을 걷는 것처럼 가벼워서 좋았지요. 외갓집 과수원은 사과 밭이 아주 넓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할머니 사과 밭에는 지금은 찾기 힘든 홍옥과 국광이라 불리는 탐스러운
사과를 맺는 잘 자란 나무가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지요. 여름날 세차게 퍼붓던 비가
그치면 낙과를 줍고 나무를 돌보는 할머니 옆에서 뛰놀던 까마득한 기억이 있습니다.
외할머니는 사과를 홍옥이나 국광 구분 없이 ‘능금이라’ 했지요. 수풀 속
사과나무는 그리운 할머니와 오래 잊고 살았던 정겹고 이쁜 이름, 능금을 떠올리게
하네요. 능금은 우리의 옛 과일입니다. 삼국시대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그
이름은 ‘임금林檎’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지요. ‘임금’은 왕을 뜻하는 임금과
소리가 같아 고귀한 과일이라 생각했으며 고려 때나 조선 초기에는 수도에 능금나무
심는 것을 장려했다고 하네요. 예전엔 흔히 마을 주변에 심고 열매를 즐겨 먹었으나
새로 외국에서 들여온 사과에 밀려 지금은 거의 없어져 버렸답니다. 아마도 능금이
사과보다 열매가 작으며 시고 떫은 맛이 나기 때문이겠지요.
사과를 능금이라 부르던 외할머니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다했습니다. 멈추지 않는
세월 속 우리의 세상도 흘러가고 있지요. 야생상태로 자란 사과나무 한 그루. 한 100년
전쯤에 떨어진 능금 씨앗 하나 깨어나 뿌리내린 것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서양 문명과 역사에는 사과에 얽힌 얘기가 많지요. 창세기 창조 설화에 나오는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 그리스 신화엔 불화의 열매인 파리스의 황금사과, 스위스 국민의 저항과
투쟁을 상징하는 빌헬름 텔의 사과, 또 뉴턴, 스피노자, 백설 공주의 사과가 있습니다.
지금, 가장 많이 떠오르는 사과는 IT 회사 애플의 ‘벌레 먹은 사과’이겠지요. 세상을
바꾸는 혁신의 아이콘 - 벌레 먹은 사과는 따 먹을 수 없는 금단의 열매 혹은 넘어야 할
목표의 대상입니다. 선택과 결정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는 우리의 몫이지요. 살면서
결정한 순간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고, 비싼 대가를 치른 성공이라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제 아무도 사과를 능금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변하는 세월 따라 잊혔던 기억을
되살려 준 야생 사과나무 한 그루. 가지마다 품고 있던 자그마한 사과는 어쩌면 모두
벌레 먹은 사과일지도 모르지요. 주렁주렁하던 사과를 누가 다 따 먹었을까,
궁금하네요.
한 여인이 막대기로 사과나무 가지를 막 후려쳤습니다. 두 번째 여인이 뒤꿈치를 들고
가지를 붙들며 허리 맨살이 다 드러나도록 사과를 잡고 당기는 것도 보았지요. 마지막
여인은 고리와 그물주머니를 단 긴 막대기로 사과를 따려 했지요.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신화 속 세 여신,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테나를
보는 듯했습니다. 트로이의 아들 파리스는 황금사과의 주인으로 아프로디테를 선택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헬레네를 아내로 얻지요. 파리스의 선택은 결국 자신과
트로이를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신화 속 세 여신의 비유는 삶의 가치를 상징하겠지요. 헤라의 권력, 아프로디테의
사랑, 아테나의 지혜는 인생의 목표로 내세울 만한 가치입니다. 이성은 인생의 가치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항상 균형 있는 삶을 꿈꾸지만, 가슴에서 솟아나는 감성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지요. 우리의 시간은 권력과 사랑, 지혜의 아름다운
균형으로 조화로운 순간이 흐르고 쌓이면 좋겠습니다.
야생 사과나무 앞에 서 있습니다. 텅 빈 가지 사이를 하릴없이 맴돌던 바람의 줄기는
천천히 늦은 저녁노을 속으로 묻혀 들어 갑니다. 잡풀 더미에 떨어져 있는 자그마하고
못생긴 사과 하나 어슴푸레 눈에 들어오네요. 분명 벌레 먹은 사과이겠죠. 발 아래
나동그라진 사과를 선뜻 집어 들지 못해 망설이고 있습니다. 어쩌다 하나 남은 사과는
미약한 마음을 이리도 어지럽히고 있는지요. 내일은 저 벌레 먹은 사과를 견뎌낼 용기와
지혜를 가질 수 있을까요.
주렁주렁 야생 사과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과연, 황금사과 하나 어느 손에 있는 것인지
야생 사과나무 아래 만남도 우리 시간인 것을,
세월 가듯이 세상이 흘러 인연도 흐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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