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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안개 2022.02.14 (월)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마을을 다 삼켜버린 그는쉬지 않고 자신의 몸을 산산조각을 내며 분신을 낳는다분신은 또 다른 분신으로똬리를 틀며 사방에 서린다젖은 어깨 시린 등을 메고발밤발밤 회색 그림자 속을헤매는 누군가 내지르는 절규그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않는 지워지고 가려진 소리혼자 무너지고 스러지는데,점점 더 많이 분열할 뿐도통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산바람 숲 바람 맑은 날개울 살얼음판 아래 찰랑대는물소리 바람에...
강은소
야생 사과나무 2021.12.10 (금)
사과나무 한 그루가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갑자기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나무는 작고 발그레한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는데,미처 가을이 끝나기도 전에 까치밥 하나 없이 마른 가지 뿐입니다. 사과는 모두 어디로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수풀 가에 서 있던 키 큰 삼나무 밑동까지 잘려 나간 뒤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습니다. 수풀에 자리해 쉽게 드러나지 않던 야생사과나무입니다. 가지에 매달려 노라발갛게...
강은소
2021.09.06 (월)
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자문위원능소화 핀 담벼락을 만난다주홍빛 화염을 마구 뿜어내는거칠고 억센 꽃의 풀무질그 뜨거운 바람은 사정없이한쪽으로만 달려간다시시각각 불길은 활활거리고세상이 와르르 허물어지고익숙한 풍경과 오래된 이야기모두 놓쳐버린 나는 나에게서저만치 나를 놓아버린다둥둥 떠도는 발걸음 멈추고능소화 바스러진 절벽 아래나를 잡으려 안간힘 다해 보지만가슴 골 땀방울처럼 미끄러지며잡히지 않는 나는 또...
강은소
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바람이 분다. 관계의 쓸쓸함이 묻어 있는 회색 바람. 바람은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의 집과 집 사이로 잦아든다. 적당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척, 척.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척하는 마음도 회색이다. 회색 바람이 분다.   올해 수필 동인지 글의 주제는 ‘가장 버리고 싶은 것’이다. 몹쓸, 팬더믹 때문에 원고 마감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책상에 한 번도 앉지 못했다. 코로나...
강은소
보통의 하루 2021.01.25 (월)
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잘린 머리카락 바닥에 자꾸 쌓인다삭둑삭둑 두 가위 날이 서로 맞닿아머리 숱을 솎고 길이를 다듬는 일한 번도 스스로 해본 적 없던 일을 코비드-19, 난데없는 그놈 때문에커다란 보자기 목과 어깨에 두르고옛날 어머니처럼 쓱싹 가위질한다 비가 내린다 겨울비는 수직으로 또사선으로 무섭게 내리치며 쏟아진다순식간 길거리에 넘쳐흐르는 물줄기적막한 거리 휩쓸며 끝 간 데 없다 코비드-19, 지랄 같은...
강은소
10월, 어느 저녁 2020.10.27 (화)
크랜베리 다 걷어버린 뒤남겨진 차가운 물바다를 따라나란히 열린 길을 걷는다길은 곧게 뻗어 있는데걸음이 자꾸 비틀거리는 저물녘재색으로 가라앉은 하늘 아래바람은 저 혼자 쓸쓸히 떠돌다와락 현기증을 몰고 달려든다가을이 흐르는 길목에서갈피를 잃고 주춤거리는 발걸음넋 놓고 바라보는 시간의 끝자락잠시 선명해지듯 다가오다가어느새 다시 희미하게 멀어지는길은 언제나 황량한 들판이다물 위로 둥둥 떠 오르던크랜베리 그 붉고 단단한...
강은소
사슴 2020.07.20 (월)
옛 시인이 노래했지모가지가 길어 슬픈 너를관이 향기로운 짐승 너를무척 높은 족속이었다고 모퉁이 나지막한 풀밭에지친 다리 쭈욱 뻗고 앉아우물 같은 눈으로 길어 올린길다란 속눈썹 어여쁘다   윤기 빛나던 너의 옷자락거뭇거뭇 저승 꽃 피어나고시간의 더께 덕지덕지 붙어주름진 모가지가 되어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그저 편편便便한 얼굴을 하고마주한 채 바라보는 세상눈이 깊어서 자꾸 아픈 너 무명의 시인은...
강은소
울울 봄날 2020.06.01 (월)
바람이 분다참나무 감비나무 삼나무나무들 어깨를 맞대고 선당신의 마당 그 숲에 검은물결이 몰아친다 쏴아 쏴오래전 떠나간 어머니 꼭 닮은가문비나무 가지 사이사이로열 아홉 코비드* 넘실대는울울 봄날이 간다 바람이 불고천둥에 하늘이 운다날카로운 톱니를 숨긴코로나바이러스란 놈, 낯선그 놈은 인정사정이 없다동아줄 감고 체인 톱을 휘둘러반나절에 열 손가락 두 팔다 잘리고 또 뽑힌 발 아래토막 나 동그라진 몸통조금씩 멀어져...
강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