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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아홉,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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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1-06-21 11:48

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바람이 분다. 관계의 쓸쓸함이 묻어 있는 회색 바람. 바람은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의 집과 집 사이로 잦아든다. 적당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척, 척.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척하는 마음도 회색이다. 회색 바람이 분다.


  올해 수필 동인지 글의 주제는 ‘가장 버리고 싶은 것’이다. 몹쓸, 팬더믹 때문에 원고 마감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책상에 한 번도 앉지 못했다.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며 실내 모임이나 활동이 어려워 야외운동에만 빠져들다 보니 글 쓰는 일에 하염없이 게으름을 피운다. 부끄러운 일이다. 글을 쓴다는 건 살아온 시간의 자기반성이며 살아갈 시간을 위해 생각을 모으는 노력이다. 아무 생각 없는 시간은 불안하고 초조하게 흘러간다. 널브러진 의식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영원히 죽여버리는 일이 없도록 안간힘을 다해 글을 쓰려고 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능한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본다. 글을 쓰기 위해 거울 속 이면에 숨은 9세 어린 양부터 59세 주름 깊은 노새를 만난다.

    

  한없이 맑고 깨끗한 화선지. 때 묻지 않은 흰 빛, 아홉은 순수했지만

  쉰 아홉은 물이 들었다. 얼룩진 화선지,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회색.

  천만다행이다, 화선지 위 떨어진 먹물 방울들 번지고 번져 엷어진다.


  자기계발서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오십이 되었다>는 오십이 ‘척’에 숨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때라 한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누구나 마음은 있어도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삶이라는 불확실한 시간 앞에 어느새 둘러 쳐 놓은 방어막이 있다면 지천명의 맑은 눈으로 가려진 그늘을 하루빨리 걷어내야 한다. 여름날이면 뜨거운 태양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그늘로 찾아든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오고 겨울이 오면 그늘을 위한 가림막이 더는 필요치 않다. 저녁이 오면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가려진 그늘을 걷어내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야 한다. 숨겨 놓았던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고 주관적인 삶을 가꾸어 나가는 열정이 필요하다.


  언제나 현실과 이상은 거리가 멀다. 회색으로 물든 쉰 아홉 마음은 점점 더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척이다. 오십이 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주변에 자욱하던 회색 기운이 자꾸 여린 눈 속으로 스며들어온 것 같다. 지금 여기 더불어 사는 우리는 서로의 타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고 있을까. 과연 우리는 서로를 인간 답게 바라봐 주는 것일까. 의심의 눈빛은 더욱 탁하게 물들어간다. 탁한 눈과 어두운 마음으로 마주한 타자는 대부분 회색분자이고 심지어 뇌동부화하여 일을 꾸미는 사람이다. 때로는 회색분자를 몰고 가는 잔머리, 그 꼭두각시놀음에 번번이 작거나 큰 소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람의 올바른 도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해야 한다. 쉰 아홉, 회색으로 물든 마음에 보이는 타자는 공감의 의미를 악용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방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들쑤시고 떠들썩거려 놓는다. 사실은 공감과 거리가 먼 정의의 나팔을 불어 대며 즐기고 있는 듯하다. 오랫동안 인간과 인간, 그 관계성의 의미는 함께한 세월에 있다고 믿었다. 이제 사람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는 회색 시대다. 긴 세월 서로 아끼고 보듬어 주던 관계는 실제는 서로 필요로 이어진 만남이고 득이 없어지면 철저히 내팽개쳐진다. 서로의 의미는 더불어 보낸 시간이 아니라 계산된 이해 득실일 뿐이다. 모두 타자의 횡포에 휘둘려 스스로 검게 얼룩지는 마음이 된다. 


  오늘, ‘가장 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오십의 끄트머리다. 순수하던 아홉 살 어린 양은 기억조차 까마득하고 쉰 아홉 나이 든 노새 한 마리 우두커니 마주 서 있다. 세상은 여전히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회색 물결 속이다. 가장 버리고 싶은 것, 그것은 회색으로 퇴색해 버린 쉰 아홉 마음이다. 버리고 싶다. 호주머니 귀퉁이 깊숙이 낀 먼지 찌꺼기 뒤집어 털어내 듯 없애 버리고 싶다. 할 수 있다면, 쉰 아홉 내 마음 탈탈 털어 멀리 가는 바람에 확 날려버리고 싶다. 


  사람은 아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안다. 무지한 사람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고도 무감각하다. 아무리 바탕이 선한 마음이라도, 스스로 의도치 않았다 해도 당하는 사람의 상처는 깊게 남는다. 사람은 또 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본다. 자신이 할퀸 타인의 상처를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외면한다면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다. 살면서 어리석은 잘못에 빠져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배우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배워 앎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겸손해하며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우아하다. 그는 기품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우아하게 나이 들고 싶다.


  나이 들수록 점점 아름다워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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