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그 기억속의 자유

정숙인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11-02 11:34


그 기억속의 자유

                                                    정숙인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아침에 일어나니 창문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고양이 네로는 이슬때문에 밖이 잘 보이지 않자 솜방망이 발로 열심히 창문을 문질렀다평소에 새와 다람쥐들을 즐겨보던 것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나서일게다비와 함께 굵은 눈발이 드문드문 날렸다스산한 날이었다절기는 속이지 못하는지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다가오고 있었다돌연 삭풍이 휘몰아쳐 둘러선 소나무들에서 엄청난 양의 솔잎들이 마구 떨어졌다찬바람이 부는 이맘때가 되면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라 마음 붙일 곳 없는 부초처럼 휑한 심경이 된다그 때가 언제라고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강산이 세 번 하고도 반절이나 바뀐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열 여덟 청춘의 시간은 상흔의 덫에 걸려 있다.

그 당시 나는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는 학교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무엇을 하든 자유롭고 싶었지만 감히 꿈꿀 수 없었다한밤중에 끝나는 야간 자율 학습에 억지로 등 떠밀려진 수험생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으로 호흡하고 싶었다맑고 푸른 하늘 아래 눈부신 햇살을 쬐며 나뭇잎에 반짝이는 이슬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었고 아침에 눈을 떠 청량한 새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고 싶어했다친구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축하하며 들꽃이 만발한 언덕에서 함께 연애편지를 읽고 구김살 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언제든 나를 받아주는 포근한 바다를 찾아 백사장 모래밭에 앉아 목이 쉬도록 쌓인 울분을 짐승처럼 포효하고도 싶었다흔하디 흔한 일상의 자유가 얼마나 귀하고 그리웠는지 자고 일어나면 어른인 대학생이 되어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빌고 잠자리에 들었다일 년 내내 불안으로 짓눌러 살아야 했던 아이들은 뭐든 기회가 된다면 그 끝을 붙들고 자유를 향한 몸부림을 쳤다다섯 시에 정규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후다닥 저녁 도시락을 까먹고 책상에 고개를 박고 공부를 했지만 참을 수 없던 무리들은 저마다 원하는 자유를 찾아 기꺼이 탈출했다누군가는 과감히 담장을 넘어 영화를 보러 가고 누군가는 학교 옆 시장에서 떡볶이를 사 먹고 그 길로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 갤러그나 1942 같은 게임에 몰두하는 일탈을 벌였다물론 그 대가는 엄청났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또 다른 내일의 완벽한 일탈을 도모하였다소극적이었던 나는 그저 연습장에 소설이나 싯구절을 끄적거리는 것으로 영혼을 달래며 침묵으로 버티었다찬바람이 불고 칠판에 디데이의 숫자가 한 자릿수로 바뀌었어도 안쓰러운 청춘들은 뒤돌아 앉아 수다를 떨기에 여념이 없었고 여전히 이어폰을 귀에 꽂고 FM라디오를 챙겨 들으며 몰래 자유를 만끽했다마지막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던 날에 나는 지금의 롯데월드 잠실점이 들어선 곳에서 깊게 파인 공사현장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검붉은 태양은 원하는 자유를 갖지 못해 불만인 열 여덟 가슴을 토닥이며 저물고 있었다.반에서 꼴찌를 한 짝꿍의 탄식을 들으며 나는 지평선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 태양을 바라보며 정녕 대학을 가야 하는지 절로 들어가 계속 글을 써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그리고 나는 지금 그 때가 너무나 그리웁다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과연 열 여덟에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창문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는데 문득 한 노래가 떠올랐다. ‘해지는 저녁 창에 기대어 먼 하늘 바라보니 나 어릴 적에 꿈을 꾸었던 내 모습은 어디에 가슴 가득 아쉬움으로 세월속에 묻어두면 그만인 것을 얼마나 더 눈물 흘려야 그 많은 날들을 잊을까얼마나 더 기다려야 내가 선 이 곳을 사랑할 수 있을까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위잉잉!“뭐야! 기분 나쁘게.”나는 이어폰 볼륨을 좀 더 높였다.‘바보야, 그래가지고 들려? 더 높여야지!’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이상하네? 녹음할 때 잡음이 들어갔나? 내 귀가 잘못됐나?’나는 이어폰을 뽑고 면봉을 찾아 귀를 후볐다.‘아악! 하지 마! 아파!’“엄마야!”나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안은 고요했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음악을 더 크게 틀었다.‘히히, 볼륨을 더, 더 크게 올려야지!”“누, 누구야?”소름이 오소소...
이정순
절친 2024.04.30 (화)
   자연 속에는 서로 반겨주는 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울긋 불긋 물든 단풍과 그와 잘 어울리는 단짝 낙엽, 따스한 봄 볕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개나리, 흐르는 강 줄기와 강물에 치덕 치덕 내리는 빗줄기. 며칠 전 강변에서 비 님과 호젓한 시간을 보내었어요. 우산에 떨어지는 사근 사근 빗방울 소리 들으니 공연히 실룩 거리는 입에서 맥없는 웃음이 나왔어요.저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꼭꼭 숨겨둔 절친이 있어요....
박혜경
송금 전표 2024.04.30 (화)
낡은 지갑 속에서낡은 쪽지 한 장을 발견 한다아버지 이름으로 입금된 송금 전표싸늘한 시체처럼 싸느랗게 떠오르는 이름 석 자이제 그 이름으로 입금 시킬 아버지가 없다적은 금액 속에 묻어 나는 까만 눈물풍수지탄風樹之嘆, 풍수지탄風樹之嘆내 얄팍했던 지갑이 원망스럽다아니다, 아니다 얇은 지갑이 죄가 아니다지갑 속에 숨어 있던 내 양심이 죄다아버지께 송금된 마지막 교신이 세상 큰 바다를 건너가신 마지막 흔적이제는 입금 시킬 곳 없는...
이영춘
봄밤 2024.04.22 (월)
언제 와 닿았을까벚꽃잎 살랑이는 듯한 손짓어리여린 초록빛 말 한마디깡깡 얼었던 맘을 동그랗게 녹여내고눈 녹아 흐르는 개울물처럼속살대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마음이 간질거린다사랑이 왔구나
이인숙
곁에서 2024.04.22 (월)
첫 인터뷰를 했다. 캐나다로 돌아와서 쓸 수 있는 글과 써야 하는 글 사이에서 고민했다.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한인 이민자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인생을 기록하고 싶었다. 평범한 이민자인 부모님의 낡은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 시작한 글쓰기의 반경을 넓히는 작업이다. 이민자는 모국에서 만큼 인정받을 기회가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이야기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알아주는 이 없는 한인 이민자의 이야기를, 휘발되기 전에 쓰고...
김한나
  머리가 허연 사내 하나가 털이 하얀 강아지 한 마리와 동네 골목을 산책 중이다.산책하고 싶어 한 게 개였는지 사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강아지가 앞장서고 사내가 뒤를 따른다. 강아지가 길모퉁이에 멈춰 서 있다. 아랫도리를 낮추고 볼일을 보는 개를 사내가 조용히 기다려준다. 꽁초 한 개비 마음 놓고 못 버리는 인간의 거리에 천연덕스럽게 응가를? 무슨 상관이냐고, 갈 길이나 가시라고, 녀석이 흘끔 위 아래로 훑는다. 녀석이 일어선다....
최민자
시와 종교 2024.04.22 (월)
고통과 시련으로 가슴에 든 멍을 씻어주는시는 훌륭한 마음의 의사무언가 될 듯 안 될 듯할 때의 괴로움이無 자의 깊은 화두가 되어참회의 순간으로 깨달음을 구하네꽃잎이 지고 말라도 봄 날봄바람은 다시 찾아와꽃을 다시 피우고나비로 다가와 시의 향기를 풍기네때론, 울긋 불긋 가을 바람에귀뚜리 소리가 눈물 짓게 하고하얀 눈 발이 날리는 겨울에는외로움에 시를 쓴다네보고 읽고 듣는 시마다시구는 생겨났다 사라져도생의 길잡이로깨달음이...
강애나
풍경 속 평온 2024.04.15 (월)
햇빛 가리개 구름은머리에 하이얀 솜털을뒤집어 쓴 산봉우리를살포시 허공을 헤엄친다하늘의 풍경을 그대로 담은바다의 모습은 그지없이 평온하다바다와 산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만그냥 묵묵부답으로 본연의 자태를 취할뿐아무런 댓가를바라지 않는다하늘과 산과 바다를멀리서 지켜보는저 학동은 그지없이유유자적한데저 멀리서 뜬금없이먹구름 하나가비를 몰고오네 
구대호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