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슈퍼에 가면 ‘라고 포도’라고 한국에서 먹던 캠벨 포도와 같아 보이는 품종의 포도를 판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밴쿠버에서 파는 검은 포도는 몇 알씩 잘려서 작은 초록색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다. 인건비도 비싼 나라에서 왜 일부러 포도송이를 잘게 잘라 담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포도송이가 크지 않고 낱알처럼 흩어져 있는 포도는 상품 가치가 없다. 그래서 도매 시장으로 출하하지 않고 과수원에서 직접 포도주용으로 아주 싼 값에 팔았다.
나는 한국에서 먹던 검정 포도의 달콤한 맛을 잊을 수 없어서 한국 포도를 좋아하는 딸아이와 함께 가끔 이 포도를 사 먹었다. 한국 포도는 캐나다에서 흔히 파는 포도와 달리 껍질과 알맹이가 쉽게 분리되어 알맹이만 먹는 분도 많다. 하지만, 나와 딸아이는 포도 씨만 뱉어내고 포도 껍질까지 다 먹는다. 포도 껍질에 영양분이 많이 들어서 건강에 좋기 때문이기보다는 잘 익은 포도 껍질을 깨물어 먹어야 정말 포도의 참맛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 여름 방학이 되면 포도밭 지기로 아침을 먹으면 곧장 포도밭으로 가 원두막을 지켰다. 다른 오누이들이 가끔 같이 가기도 했지만, 포도밭은 주로 내 담당이었다. 포도밭에는 포도가 가장 많이 심겨 있었지만, 자두, 살구와 복숭아도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제일 먼저 자두를 따서 팔았고 그다음이 복숭아였다. 그런데 자두는 따서 카바이드를 넣어 저장고에서 익힌 다음에 출하해야 했고, 복숭아는 털이 너무 따가워서 나는 껍질을 어른들이 벗겨 주시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그러니 포도밭에서 내가 스스로 따 먹은 과일은 포도뿐이었다. 8월이 깊어가면 포도가 까맣게 잘 익어 갔다. 그때가 되면 나는 원두막에서 자주 내려와 관리하기 쉽게 철삿줄에 묶인 포도나무 밑으로 갔다. 먼저 송이가 큼직한 포도송이를 찾고 병충해를 막으려고 씌워 놓은 하얀 봉지를 살짝 찢어서 까만 포도알 위에 낀 하얀 분이 벗겨진 포도만을 골라서 땄다. 포도밭에는 캠벨 외에도 델라웨어와 청포도도 있었지만 나는 가장 달콤한 검은 포도만을 따 먹었다.
한 송이에 1kg 안팎의 커다란 포도를 2~3송이씩 원두막에 앉아 혼자 먹기도 했으니 원두막 지기를 한 것이 아니라 포도 서리를 한 셈이다.
포도밭은 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그만큼 얽힌 추억도 많다. 한가롭게 드러누워 게으름도 피우고 졸기도(직무 태만?) 했다. 방학 숙제도 하고 밀린 일기도 원두막 위에서 몰아 썼다.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나를 누나가 집에까지 등에 업고 간 곳이 포도밭이었다. 원두막에서 졸고 있는데 형이 작대기로 원두막 위로 기어 올라오는 뱀을 잡아 나를 구해준 곳도 그곳이었다. 소나기가 억수로 퍼부어 아버지께서 날 데리러 오셨던 곳이기도 했다. 거기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내가 몇 번이고 쓰러져 다치면서도 키도 안 맞는 짐 자전거로 자전거를 배웠다. 곤충채집을 하고, 장대비가 쏟아진 날 오누이와 땅바닥에서 작은 물고기를 발견하고는 신기해하던 기억도, 새집에서 새알을 찾던 일도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원두막 위에서 저수지 끝자락과 산을 쳐다보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저수지는 포도밭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의 야트막한 숲과 오른쪽의 수리골이라 부르는 우리 가족 묘지가 있는 야산 사이에 끼어 한 장의 풍경화처럼 보였다.
저수지 남쪽에는 일대에서 제일 높은 산이 있고 저수지 물은 흘러서 남서쪽 마을로 흘러 들어가지만 거기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어린 내게는 그 경치가 세상에서 제일 멋져 보였다. 나는 포도밭 원두막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호젓하게 앉아 있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내가 스스로 포도밭에 매일 간 이유 중의 하나였다.
물론 이 포도밭에도 내게 무서운 곳이 한 곳 있었다. 한가운데에 버려진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거기로는 웬만하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한때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했던 젊은이가 무슨 이유인지 자살을 하였다. 내게는 초로의 할머니로 보이던 그의 어머니는 우리 집 제삿날마다 오셔서 집안일을 도와주셨다. 그분이 당신 아들이 죽은 뒤 몇 차례 우리 포도밭에 오셔서 아들을 찾으며 슬피 울다 가셨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괴로움을 처음으로 목격한 일이었지만 어린 나는 제대로 그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뒤 아버지께서는 포도밭의 포도나무를 모조리 캐어냈다. 수익성이 없다고 대신 사과나무를 심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름만 포도밭인 그곳에 시골에 내려가면 빠짐없이 찾아갔다. 원두막도 없어진 과수원의 높은 자리에 서서 저수지와 산을 바라보면서 그 너머 보이지 않는 마을과 거기 살던 초등학교 친구, 그리고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어릴 때 나는 이 담에 크면 포도밭에 집을 짓고 살겠다고 종종 생각했었다. 내가 포도밭에서 지내던 시절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과일 중에서 가장 좋아하던 포도를 실컷 먹고 걱정 없고 철없이 지내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 행복한 시절의 추억에 끌려 거기를 자주 갔다. 내가 그곳을 유난히 좋아하니까 아버지께서는 “이다음에 포도밭은 네게 주마”고 하셨지만, 외국에 이민 와서 사는 내게 포도밭은 먹지 못하는 신포도와 같다. 그저 다시 갈 수 없는 나의 행복한 유년의 추억일 뿐이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에서 여우는 포도가 맛있어 보이지만 너무 높아서 도저히 따 먹을 수 없자 저 포도는 신포도일 것이라고 자기 위안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여우와 달리 나는 어릴 적 우리 집 포도밭에서 마음껏 포도를 따 먹었다. 그런데 이제는 포도를 껍질째 먹으면 이가 시려서 포도를 거의 먹지 못하니 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검은 캠벨 포도를 신포도라고 억지를 부려야 할까? 아니다. 한국 포도는 여전히 내게 행복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는 매개체이다. 검정 포도를 보면 포도나무도 한 그루 없고 생각난다고 쉬 갈 수도 없는 우리 포도밭에서 보낸 내 행복한 어린 시절이 또렷이 되살아난다. 그럴 때면 손을 뻗어 맑은 시냇물 속의 귀여운 조약돌처럼 여전히 내 마음속에 아름답게 존재하는 그 시간을 만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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