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아메리칸 드림 - 어느 청년의 꿈이야기

김인종 vine777@gmail.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13-01-31 17:56

“내가 운전면허를 가지게 돼다니니..”     

불법체류 신분으로서  캘리포니아 스테이트 칼리지를 다니고 있는 한인여학생.   2013년 정초부터  좋은 일이 잇달아 터지고 있다.   불법체류자이지만  오바마의  이민정책에 따라  추방유예의 혜택을  봤던 이 한인여학생은   올해   1월1일부터  발효된  추방유예자 운전면허 발급법에 따라 운전면허증도 받게 된 것이다.    집권 2기의 오바마대통령은    천만명에 이르는 불벌체류자들이  미국시민이  되는 기회를   정책으로 입안하고 있다.    이민개혁법  시행에  “내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라는 강력한  의지를  오바마는 이민자  커뮤니티에  전하고 있다.  

꿈의 나라 미국에서 오랫동안  불법체류로  지내온   주변의 많은 한인들도 오바마의 이민개혁안 실현에   한껏  희망을 걸고 있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년을  버티어 온 이들은,  마음속  한편의  어둠속에서도 결코 미국합법 거주의  꿈을 버리지 않았었다.  

지금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인심좋았던  미국 시절,  불법체류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미국 이민역사에서  한 한인청년이 이룬 아메리칸 드림의 이야기가  2013년의 1월을   빛내고 있다.

한국의 일제식민지 치하시절,  이 한인청년은  9형제 중에서  2번째였다.  아버지는 농업학자로서  현장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부인등 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시골로 갔다.   다만  당시 6살의  이소년은 도시에서  공부를 계속하라고 서울에 남겨졌다.  당시 일제점령하의 학교시스템은 치열한  경쟁위주로서,  교실에서는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앉혀졌고,  이 소년은 항상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수석학생이었다.  

그는 당시 한국의 천재들이 모인다는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해방을 맞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2주후에   그의 인생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1950년 6월의 어느 아침,  포성과 함께 서울의 거리로 북한군의 탱크가 굉음과 함께 밀려들어왔다.   당시 그는 18살이었다.  북한군에 징집될 위기였다.  그는 그의 이모집과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숨어지냈다.   가구들로 가려진 문 뒤로 70센티미터 남짓한 길이의  구부릴수 있는 공간이 그의 대피소였다.   북한군이 집 인근에 오면 “손님오신다”라는 할머니의  신호가 들렸고  청년은 가구 뒤로 숨어들어갔다.  어느날은  일본어로 된 세익스피어책을 읽다가 그대로 놔둔채  대피하면서 북한군이 수상하다며 집안을 뒤졌다.   여러차례 위기를 넘겼다.  

석달후 이청년은 국군에 입대하고 소금물과 맨밥으로  1년반을 연명하며 ,  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운명의 장소,  부산에  배치돼  미군참모부의 통역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때   전쟁의 참혹한 파괴를 보며 이 청년은 건축가가 되기를 굳게 결심한다. 

그는 부대의 동료, 상관들에게 미국에서 건축공부를 하고 싶다고 그의 꿈을 자주 얘기했다.  부대 의 미군장교가 그에게 미국신문에 편지를 써서 스폰서를 구해보라고 조언을 한다.   그는 3통의 편지를 써서 미국 신문사들에 보냈다.  단 한통만이 신문에 글로 실렸다.  1952년 5월의  로스엔젤레스 타임즈 이다.   로스엔젤레스 동쪽의 몬테벨로시의 뮤리엘 맥클란드라는 여성은 이날 아침 미세너(Michener)라는 작가의 ‘아시아의 소리  Voice of Asia’라는 글을 읽고 있다가,  그날의  로스엔젤레스 타임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한 한국청년이 머나먼 전쟁터에서 보내온 글을 읽게 됐다.  

“저는 한국에서 적개심을 끝내고,  재건의 가치를 위해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한국의 현 상태는 젊은 세대들이 모든 희생을 무릎쓰고 공산군에게 최후의 승리를 얻기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살리는 노력에 전력하고 있음을   알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글에 감동을 받은 뮤리엘  맥클란드는  ‘아시아의 소리’ 작가 미세너에게  즉시 편지를 쓰고,  이 작가는 펜실베니아 벅스 카운티 자신의 집에서 답장을 보내왔다.   미세너의  부인은 건축가였다.  미세너는 이 한국청년  개인에게 돈을 주기보다는   이스트 로스엔젤레스 칼리지에 장학기금을 설립키로 했다.  

비슷한 시각,  부산에 주둔 중인 미군  제리 록웰은 여러 통의 편지를 미국으로 날렸다.   한국청년의 꿈을  아름답게 적었다.   우선 제리의 아버지 노만 록웰이 스폰서로 나섰다.  제리의 친구 제임스 캔필드도 지원자로 응답했다.  그다음,  당시 연방하원의원인  인디애나주 랄프 하베이가  스폰서로 등장했다.  한 한인청년의 꿈은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사랑의 지원으로 영글어 갔다.

이어서  전쟁중인  한국땅에서 이 청년의 미국수송작전이 펼쳐진다.  미군들은 그를 단발비행기에 태우고 일단 서울로 간다.   그는 이때의 위험한 상황 경험으로 인해,   북한군에 납치되는  악몽을 그후로도 자주 꾸었단다.   그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미국행  비행기값을   호소했다.  서구교육을 받은 의사로서  항상  자립심을 강조하던 할아버지는 이번만은  손자의 간절함을 알고 미국행 비행기 티켓과 함께  80달러를 쥐어준다.  1953년 3월 1일,  꿈꾸는 한국청년은  21살에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했다.   
이 청년의 이름은 박기서.  그후 33년,  1986년,   건축가들의  꿈,  미국건축학회(the 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의  명예의 전당에 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이 헌정된다.  박기서.    
그는 이스트 로스엔젤레스 칼리지에서 UC버클리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고,  MIT에서  석사학위를 마친다.  박기서는 당시  차별이 극심했던 건축계의 벽을 넘어 세계적인  건축회사 빅터 그루엔에서 그의 실력을 발휘한다.  LA콘벤션센터,  105번 프리웨이,  LA메트로 지하철 등의  수많은  기념비적 건축물,  그리고   LA폭동후의  LA재건(Rebuild LA) 프로젝트  등 건축건설분야 뿐만아니라,  소수민족  권익운동,  민권운동등에도 깊이 관여하며  위트니 영 상을 수상하는 등 이민자  코리언 아메리컨으로서  미국사회에  존경받는  위상을 실현해 냈다.     

그가  지난  16일  세상을 떠났다.  80세.   그의  소신은 글로 남겨져 있다.  “ 나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다.   진심으로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면 기회는 열린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이나라가 나에게 준 믿음이다. “                   

2013년 2월2일  LA통신  김인종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