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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버린 나를 보듬어준 푸른 눈의 아버지···이젠 내가 갚을 차례”

밴조선에디터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05-29 11:48

[아무튼, 주말] 치매 앓는 양부 돌보는 벨기에 입양인 반하우트
치매 걸린 양아버지 안톤 반하우트(왼쪽)와 함께한 크리스(오른쪽)와 친누나 미아(가운데).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치매 걸린 양아버지 안톤 반하우트(왼쪽)와 함께한 크리스(오른쪽)와 친누나 미아(가운데).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벨기에 브루게에 사는 크리스 반하우트(Vanhoutte·50)는 지난 4~5년간 아버지 안톤(89)과 하루도 떨어진 적이 없다. 아버지는 경증 치매 환자. 거동도 불편하고 시력은 절반쯤 잃었다. 아들은 매일 회사 일이 끝나면 곧장 아버지 댁으로 향한다. 홀로 계신 아버지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와 함께 밤을 보낸 뒤 다음 날이면 집으로 모셔다 드리기를 반복한다. 하룻밤도 아버지를 혼자 둘 수 없어 저녁 약속, 해외 출장에도 늘 동반한다.

부모 자식 간에도 개인주의 문화가 강한 벨기에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효자. 게다가 이 부자(父子)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다. 크리스는 한국계 입양인(한국명 김성수)이다. 네 살 때인 1975년 누나 미아(한국명 김미애·53)와 같이 입양됐다. 그의 지극한 효심은 벨기에 현지뿐만 아니라, 벨기에를 자주 드나드는 한국인들을 통해 국내에도 알음알음 알려졌다.

최근 화상 앱 ‘줌’으로 만난 크리스는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며 선한 눈빛으로 옅게 웃었다. “부모님은 우리 남매가 어렸을 때 저희를 데려갈 수 없는 자리라면 친구 모임, 가족·친지 결혼식에도 안 가셨어요. 삶의 중심에 늘 저희를 두셨어요. 그렇게 사랑을 쏟아주셨던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것, 그래서 하루하루 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해요.” 한국말은 전혀 못 했지만, 사고방식은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입양된 후 벨기에에서 보낸 행복한 어린 시절. 왼쪽 첫째가 누나 미아, 옆이 크리스, 맨 오른쪽이 양어머니, 오른쪽에서 셋째가 양아버지다.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입양된 후 벨기에에서 보낸 행복한 어린 시절. 왼쪽 첫째가 누나 미아, 옆이 크리스, 맨 오른쪽이 양어머니, 오른쪽에서 셋째가 양아버지다.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증권사에서 일하다가, 10여년 전부터 작은 무역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부업으로 라면집도 한다. 메뉴엔 김치 반찬 딸린 한국 라면도 있다. “김치를 먹는 순간 가슴 저 밑에서 뭔가 알 수 없는 푸근함이 밀려왔어요. 끊어진 기억이 갑자기 연결된 느낌이었달까. DNA에 깊이 새겨진 영혼의 음식 같았죠.”

가게 이름은 ‘마르코 폴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가져온 국수에서 이탈리아의 스파게티가 유래한 데서 딴 이름”이란다. “면 요리로 동서양을 잇고 싶다”고 했지만 그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것은 음식만이 아닌 듯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 한국에선 점점 사라지고 있는 효(孝)를 벨기에에서 잇고 있으니까.

크리스가 브루게에서 하는 라면집. 한글로 '라면' '김치'라고 쓴 메뉴판이 눈에 띈다.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크리스가 브루게에서 하는 라면집. 한글로 '라면' '김치'라고 쓴 메뉴판이 눈에 띈다.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동양계 중년 남성이 가는 곳마다 백발의 서양 노인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은 현지에서도 신기한 모양이다. 업무 미팅 때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버지를 곁에 둘 때도 종종 있다. “조합이 워낙 특이하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들도 있어요. 제가 입양된 아들이라고 말하면 그제야 주변에서 경계심을 늦추고 이야기꽃을 피운답니다. 유색 인종이 하나도 없는 동네에서 자라 어렸을 때도 어딜 가나 사람들이 빤히 쳐다봤어요. 그때마다 부모님이 자랑스럽게 우리 아들 딸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이젠 세월이 흘러 반대가 됐네요(웃음).”

이런 삶은 5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시작됐다. 금실 좋았던 아내와 이별하자 아버지의 기억력은 급속도로 타들어갔다. 벨기에에선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요양원으로 가지만, 그는 아버지를 직접 돌보기로 결정했다. “부모님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저희에게 손 내밀어 새 삶을 주신 분들이에요. 그분의 삶이 꺼져 가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어요. 아버지가 세상과 작별하는 날까지 손발이 되어 드릴 겁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에선 노인은 짐이라고 치부해요. 부모 세대가 지난날 희생하며 우리에게 해준 것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당신은 어떤가요?” 지구 반대편으로 간 입양인이 던진 물음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버지를 간병하는 데 누나도 동의했다. 메신저 ‘왓츠앱’으로 만난 미아는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갚는 길이기에 당연히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웃 도시 앤트워프에 사는 그는 간호사 출신으로 의료 사업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주 보호자는 크리스지만, 미아도 간병을 분담한다.

남매는 “양부모와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입양인도 많은데 우리는 정말 행운아”라고 입을 모았다. 양부모는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70년대 본국으로 돌아온 뒤 입양을 결심했다. 슬하에 친자녀는 없었다. 당시 양부는 마흔셋, 양모는 쉰이었다. 입양기관에선 나이가 너무 많다며 말렸지만, 두 사람은 “세상에 도움을 주고 싶다. 아무도 안 데려가는 아이, 장애아도 좋다”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1975년 겨울 한국에서 두 아이가 왔다. 벨기에에 도착한 날이라며 크리스가 보여준 사진 속에서 누나 미아는 담요를 꽁꽁 두르고 있었다.

1975년 12월 벨기에에 도착한 첫날. 담요로 몸을 둘러싼 아이가 누나 미아다.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1975년 12월 벨기에에 도착한 첫날. 담요로 몸을 둘러싼 아이가 누나 미아다.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너무 어려 한국 기억이 거의 없는 동생과 달리 일곱 살에 입양된 누나는 줄곧 한국을 그리워하며 방황했다. 결국 미아는 1990년대 중반 한국을 찾아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극적으로 친아버지와 상봉했다. 그토록 궁금했던 버려진 이유도 알게 됐다. 친부모가 이혼하며 남매는 보육원으로 보내졌고, 부모는 각자 재혼해 새 가정을 꾸렸다. 몇 해 뒤 친부가 남매를 만나러 벨기에에 왔다. 아들의 눈에 띈 건 아버지의 새끼손가락이었다. “새끼손가락이 휜 게 저랑 똑같았어요. 친할머니에게서 온 유전이라더군요. 이 세상 어딘가에 나와 똑같은 피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니….”

입양 당시 크리스의 여권.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입양 당시 크리스의 여권. /크리스 반하우트(김성수) 제공






1999년 한국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현실은 감동적인 영화의 대본처럼 펼쳐지진 않았어요. 어머니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해 보였어요. 기억의 문을 닫은 채, 잊고 살던 과거를 들춰내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지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자꾸 뭔가가 삐걱거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때 양쪽 가족과 연락하고 지냈지만 지금은 소식이 다 끊긴 상태다. 한국 지인을 통해 수소문해 보니 아버지는 10년 전쯤 돌아가셨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고 저도 아빠가 되고 보니 어머니가 점점 그리워져요. 한번이라도 어머니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모자지간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크리스가 말했다. 미아 역시 절절한 그리움을 숨기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고, 낳아준 것만으로 너무나 감사하다고. 이복형제, 친척도 제겐 소중한 인연이에요. 꼭, 다시, 누구라도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어요. 혹시라도 상황이 안 좋은 가족이 있으면 어떻게든 돕고 싶고요.”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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