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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2)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8-08-15 00:00

그는 울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선수의 눈물을 보는 일은 흔치 않다. 남자는 일생에 세 번밖에 울지 않는다는데. 그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울고 있었다. 아니 그의 머리 속에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마저 사라진 듯 보였다. 그저 격한 나머지 눈물을 내뱉고 있었다.

처음엔 그의 눈에 조금 물기가 맺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를 들썩였고 마침내 통곡을 하고 말았다. 동료들 조차 그의 급작스런 폭발에 당황하고 있었다. 어깨를 다독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한번 터진 남자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1990년 일본시리즈 마지막 경기였다. 다음 날 신문은 세이부(일본의 프로야구팀)의 우승 기사로 도배질돼 있었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한 선수의 눈물을 다룬 작은 박스 기사가 더 크게 들어 왔다.

그의 이름은 이토. 세이부의 포수였다. 이토는 80년대 일본 최고의 포수로 군림했으나 라이벌의 입단으로 힘든 한 해를 보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목숨을 건 정글 게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프로 선수들의 피 말리는 생존경쟁을 알지 못한다. 그의 눈물 속에서 나는 스포츠만의 독특한 한편의 휴먼드라마를 보았다.

스포츠에는 미학(美學)이 있다. 스포츠 미학은 감동을 전달한다. 원래의 사명인 전달보다 덧칠인 감동이 먼저 일 때가 많다. 체육 기자를 굳이 Sports Reporter로 부르지 않고 Sports Writer라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올림픽 취재는 감동의 도가니다. 그 숱한 뉴스의 홍수 가운데서 콧등 찐한 휴먼드라마를 찾아 내는 것은 도리어 기자의 행운이다.

유도에서 금메달을 따낸 최민호는 울고 있었다. 4년 전의 실패와 체급 선수들의 감량 어려움을 익히 아는 지라 그의 눈물에 공감이 갔다. 하지만 흔한 금메달 선수용 기사들 가운데서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최민호는 중학생 시절 아버지를 상대로 훈련을 했다.

밤 10시 이후엔 연습 상대가 없어 아버지를 업어 메쳐야 했다. 아버지를 마구 다뤄야 하는 자식도 민망했겠지만 밤마다 땅바닥에 곤두박질 당하는 아버지도 괴로웠을 게다. 최민호의 영광은 고스란히 아버지의 영광이다.

스포츠 현장에는 그런 아버지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타이거 우즈가 1997년 마스터스에서 처음 그린 재킷을 입었을 때 아버지 얼은 “We did it(우리가 해냈다)”라고 울면서 소리쳤다. 타어거 우즈라는 대단한 선수는 혼자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 얼 우즈라는 최고의 파트너가 있었기에 그의 황제 지위가 가능했다.

우즈는 2004년 포드챔피언십에서 63타의 데일리베스트를 친 후 “아버지의 생일 선물로 바친다”며 암 투병 중인 얼을 위로했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 해 마스터스 정상에 올랐을 때 우즈는 슬픔의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금빛 물살을 가른 수영 박태환의 경우 노민상 코치가 있다. 나이 마흔의 별 볼일 없는 초등학교 코치였던 그는 7살의 꼬마 박태환을 만나 인생을 건다. 그의 표현에는 비장함이 서려있다. “태환이는 내 인생이고 꿈입니다. 나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박태환은 지난해 그의 곁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1년 만에 돌아온 박태환과 노코치는 죽을 각오로 훈련에 몰두했다.

올림픽 금메달은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눈물과 땀과 피로 얼룩진 한편의 드라마가 생생하다. 올림픽이 계속되는 한 그 드라마에는 피날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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