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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③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8-03-03 00:00

바람의 땅 그리고 9일간의 트레킹

▲ 캠프 세론에서 라고 딕슨 캠프로 가는 길. 멀리 강이 끝나는 곳에 라고 딕슨 캠프장이 있다.

트레킹 1일

날이 밝자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 밖부터 살폈다. 밤새 마을을 휘젓고 다녔던 바람은 지쳐 있었고, 거리에는 다시 눈부신 햇살이 잦아 들었다.

7시 30분 정각,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가는 버스가 게스트 하우스 문 앞에 정차했다. 이 숙소에 함께 묵었던 여러 명의 트레커들이 몸통만한 배낭들을 짊어지고 모여들었다.

버스는 마을의 게스트 하우스를 몇 군데 돌아 승객을 더 태우고는 파이네 국립공원을 향해 달려갔다. 마을을 벗어나 잠시 후, 아스팔트는 끝이 나고 비포장 도로로 접어 들었다. 도로는 한산했고 가끔 마주 오는 차량으로 흙먼지가 연막탄 같이 자욱했다.

두 시간쯤 지나자 멀리 신비로운 또레스 델 파이네의 전경이 나타났다. 버스 안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운전기사가 버스를 멈추어 주었으나, 바람이 너무 세서 카메라를 고정할 수가 없었다.

버스는 구아나코(라마의 일종)가 방목되고 있는 산기슭을 몇 차례 돌더니 국립공원 입구 라구나 아마르가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트레커들은 이곳 공원 관리사무소에 이름과 국적, 트레킹 일정 등을 신고하고, 일인당 1만페소씩(약 20달러) 입산료를 지불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라스 또레스 캠프장으로 이동했다.

트레킹과 관광의 시발점인 라스 또레스에는 캠프장 외에도 산장과 나지막한 단층 호텔이 널찍한 풀밭 위에 띄엄띄엄 퍼져 있었다.

풀밭 한 켠에 텐트를 치는 동안 아내는 빵과 소시지로 점심식사를 준비했다. 정오 무렵, 점심식사를 대충 끝낸 우리는 아내의 배낭을 비워 오늘 산행에 필요한 옷과 스낵, 물을 챙겨 넣고 텐트를 떠났다. 날씨가 화창해서 산행하기에 최적의 날씨다. 목적지 또레스 전망대까지는 왕복 20km.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파이네의 암봉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떠있다.

평지를 얼마간 걷다가 오른쪽 산등성으로 고도를 높였다. 이 갈림길에서 직진을 하면 W코스가 시작된다. 땀을 닦아가며 산등성에 오르니 그 뒤로 깊은 계곡이 전개되었다. 그 계곡의 끝에 숨어 있는 봉우리가 오늘의 목적지다. 숨을 고르는 동안 계곡 안쪽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강풍이 몰아쳤다.

여기서부터 길은 거의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또레스 캠프장부터는 커다란 바위들로 급경사를 이룬 너덜지대가 시작되었다.

한 시간 정도 돌밭을 기어 깔딱 고개에 올라서니, 바로 눈앞에 하늘로 치솟은 또레스의 암봉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흡사 탑 모양 같은 거대한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수백 미터 수직으로 암반 위에 박혀있고, 그 아래 녹색의 빙하호가 바위 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얼음 녹은 물줄기를 받아 내고 있다. 이 암봉들이 백두산만한 높이라니…. 쉽게 접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비경에 우리는 넋을 놓고 있었다.

파랬던 하늘에 어느 새 검은 구름이 덮이기 시작하더니, 냉랭한 바람이 우리를 밀어냈다. 우리는 털모자와 장갑을 착용하고 서둘러 하산하기 시작했다.

해가 길어 하산길이 여유로웠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노래도 부르면서 어슬렁대다가 밤 10시경에 텐트로 돌아왔다. 더운 물이 이미 바닥이 난 샤워장에서 냉수로 땀을 씻고 나서, 버너에 물을 끓여 두 개 가져온 컵라면으로 늦은 저녁식사를 마쳤다.

빨래를 텐트 옆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좁은 침낭 속에 애벌레처럼 꿈틀대면서.

트레킹 2일

오늘 아침도 날씨가 청명하다. 빵과 버섯수프로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는 오전 10시, 느지막하게 길 나설 채비를 마쳤다. 작업은 분화되어서 아내가 식기를 챙기는 동안 나는 텐트를 철수하는 식이다.

오늘의 목적지 캠프 세론까지는 17km. 지도의 등고선을 따져보니 어려운 길이 아니다.

여기서 4일 코스 W루트는 서쪽으로, 우리가 가는 파이네 서킷 루트는 동쪽으로 돌아 8~9일간 총 130km 정도를 걷게 된다. W코스에 비해 장거리 코스인 파이네 서킷에는 트레커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초입에서 언덕을 오르는데 산티아고에서 온 보이스카웃 단원 20여명이 커다란 배낭을 지고 힘차게 우리를 추월해 갔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아장아장 펭귄 보법으로 저만치에서 따라오고 있는데, 이 보법의 특징은 느릴지언정 절대 포기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남보다 일찍 출발해도 반드시 남보다 늦게 도착하는 ‘선발후착’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속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시간이 잘도 흘러간다. 점심을 먹기 위해 전망이 트인 언덕 풀밭에 양말을 벗어제치고 앉았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사온 빵이 어찌나 뻑뻑하고 맛이 없든지, 이런 경우 시장이 반찬이란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반나절이 지나 도착한 산등성에서 아래를 굽어보니 강물은 완만히 흐르고 그 옆으로 들판이 펼쳐졌는데, 온통 하얀 꽃 천지다. 마가리트라는 국화과 설상화로, 이 꽃 들판은 다음날에도 종일 계속되었다.

꽃길을 가로질러 오후 5시경 캠프 세론에 도착했다. 우리를 앞질러간 트레커들이 이미 텐트 설치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둥 부산하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텐트를 치고, 캠프장 관리소에 자리 값으로 7000페소(2인)를 지불하면서 계란과 깡통 과일칵테일을 사왔다. 통조림 과일이 비타민 공급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트레킹하는 동안 신선한 야채와 과일은 언감생심이다.

우리 옆집은 벨기에에서 온 젊은 커플로 텐트 앞에 담요를 깔고 앉아 카드놀이를 하고 있고, 앞 텐트에는 미국 몬타나주에서 온 떠벌이가 칠레 청년들 사이에서 수다에 열중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느긋하게 라면에 계란을 풀어 저녁을 먹고 과일 칵테일과 사과차로 후식까지 마쳤다. 식사를 하는 동안 캠프장 앞에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곳도 위도가 높은 탓에 여름 해는 10시가 넘어서야 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텐트 앞에 앉아 들판 위로 어둠이 깔리는 고즈넉한 순간순간을 명상하듯 바라 보았다. 저녁이 되면 일기 변화가 심해, 플리스 내의 위에 겹겹이 세 벌을 껴입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트레킹 3일

오늘 목적지는 캠프 라고 딕슨까지 20km. 파이네 서킷 전 구간 중에서 가장 긴 거리다. 지도를 보니 긴 거리이긴 하지만 큰 오르막은 한 번만 있고 대체로 순탄한 지형이다. 우리 걸음속도와 도착시간을 감안해서 남들보다 먼저 길을 떠났다.

강을 끼고 걷는 동안 같은 시간에 캠프장을 출발한 이스라엘의 신혼 부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이 젊은 부부는 4개월 동안 중남미를 허니문 여행 중이다. 허니문을 배낭여행으로 하고 나면 결혼생활 몇 년보다 상대방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두 시간쯤 지나자 들판이 끝나고 예상했던 대로 커다란 덩치의 산등성이 나타났다. 가파른 경사면 위로 지그재그 오르막길이 까마득하다. 배낭의 멜빵과 허리벨트를 단단히 조이고 좁은 흙 길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광활한 주변의 경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산과 호수와 강과 들판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풍광이어서, 온몸을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쯤은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노란 들꽃 언덕을 지나고 질퍽한 늪지대도 건넜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수통의 물도 다 떨어질 무렵, 벼랑 아래로 멀리 딕슨 캠프장이 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평지에 원색의 텐트들이 점점이 박혀있고, 그 뒤로 호수와 빙하가 흐르는 얼음 산이 버티고 있다.

그러나 이 캠프장은 이토록 훌륭한 주변 경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모두에게 가장 낮은 평점을 받았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기떼 때문이다. 들숨을 하면 공기보다 모기가 먼저 콧속에 들어오니, 산소보다 모기가 더 많은 게 아닌가 싶다. 텐트를 칠 때나, 식사를 할 때나 이마에 붙고 목에 붙고 하는 모기떼를 손바닥으로 쳐내다 보니 영락없는 마빡이가 되어버렸다.

특히 피부가 흰 서양인의 얼굴과 팔뚝에는 모기 물린 붉은 반점들이 홍역 자국 같이 흉측하게 만발했다.

캠프장 관리소 매점에서 사온 마카로니 국수로 저녁식사를 어렵게 마쳤다. 모기의 방해공작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캠프장 관리소에서 식품을 취급한다고는 하지만, 운송의 어려움이 있으니 종류가 극히 한정되어 있고 값도 두 배가 넘는다. 인스턴트 마카로니나 봉지 쌀로 매 끼니를 때우든지 아니면 무겁더라도 아예 식량을 지고 와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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