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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5-02 15:17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골목은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 휘황한 네온 사인도, 대형마트도, 요란한 차량의 행렬도 없다. ‘열려라 참깨!’를 외치지 않아도 스르륵 열리는 자동 문이나, 제복 입은 경비원이 탐색하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 내리는 고층 빌딩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길목 어름에 구멍 가게 하나, 모퉁이 뒤에 허름한 맛집 하나 은밀하게 숨겨두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일상의 맥박  삼아 두근거리는, 웅숭깊고 되바라지지 않은 샛길이어서 좋다.

골목은 자주 부끄럼을 탄다. 큰 줄기에서 뻗어 나와 섬세한 그물을 드리우는 잎맥과 같이, 골목도 보통 한 길에서부터 곁 가지를 치고 얼기 설기 갈라져 들어간다. 하여 골목의 어귀는 대충 크고 작은 세 갈래 길을 이루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골목들은 입구 쪽을 어수룩이 숨겨두기를 좋아한다. 한두 번 다녀간 골목을 섣불리 찾아 나섰다가 낭패를 보게 되는 것도 그들이 일쑤 낯가림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다 싶은데 없고 저기다 싶은 데 아니다. 눈앞을 가로막는 시멘트 벽의 완강함, 4차원의 입구처럼 사라져버린 미로를 몇 바퀴씩 서성거리고 나서야 목적지를 발견할 때도 있다. 헤진 속옷과 빛바랜 수건과 색색의 양말 짝들이 담장 너머로 공중 그네를 타고, 밤사이 새끼를 친 무수한 말들이 담 벼락 사이로 수군 수군 넘나드는, 응달진 사람들의 남루한 삶터가 부끄러워 골목은 자꾸만 꼬리를 감추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용케 골목 입구로 접어들었다 해도 안심할 것이 못 된다. 이 좁다랗고 다소 내성적인 공간은 낯선 사람들에게 속내를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 진행에 따라 약간의 전망을 예측하게 할 뿐, 모퉁이 뒤에서 기다리는 정경을 속속들이 암시하지도 않는다.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방금 지나온 풍경도 가뭇없이 여미어 버리고 밋밋한 회 벽만 내보이며 딴 전을 피우기도 한다. 과거란 빨리 잊을수록 좋은 거라고 충고라도 하려는 듯이. 골목의 이런 은폐성이 난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때도 없지는 않다. 골목이 없었다면 늦은 밤 애인을 바래다주던 청년이 느닷없이 돌아서 키스를 훔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며, 코밑 검실 검실한 삐딱 모자 소년이 도둑 담배의 유혹에 걸려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미진 은신처에 웅크리고 있던 깍두기 형님들의 야행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던 곳도 음습한 뒷골목 아니던가. 골목은 윤리를 따지지 않는다. 그런 걸 따지기에는 너무 인정에 약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골목의 윤리인지도 모른다.

  골목은 약한 것을 강하게, 강한 것을 약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 길에서 피켓을 들고 아우성 치던 사람도 골목에 들어오면 갑자기 순해져서 허리 굽은 노인에게 곧잘 허리를 굽히곤 한다. 큰길에서 씽씽 내달리는 고급 차일수록 골목에 들어서면 맥을 못 추고 설설 기는데, 철 가방 오토바이는 왕 파리 소리를 내며 홈그라운드를 가볍게 휘젓는다. 야채 트럭 아저씨가 ‘고랭지 배추 왔어요. 산지에서 직송한 사과가 왔어요!’를 기세 좋게 외치는 것도 한 길이 아닌 골목길에서다.

골목의 시간은 느리다. 한 잔 술에 거나해진 남자가 외 눈 박이 가로등 아래를 갈지자로 흥청이며 ‘사랑만은 않겠어요’ 를 흥얼거려보는 곳도, 산전 수전 다 겪은 안 노인들이 구부정한 어깨로 쭈그려 앉아 누추한 일상을 구시렁거려보는 곳도 시간이 멈추어 버린 골목에서일 것이다. 골목에서는 바람도 속도를 늦추고 모퉁이에 쌓인 눈 더미마저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천천히 녹는다. 달각거리는 냄비 소리, 도란거리는 말소리, 선잠 깬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진즉 생의 이면을 알아버린 사람들의 가슴조차 잔잔하게 흔들어 놓고, 밥 냄새, 찌개 냄새, 비 오는 날 호박 전 부치는 냄새가 가난했지만 가난을 몰랐던, 아늑하고 따스한 기억 속으로 우리를 가만히 데려다 놓는 것이다.

땅 팔자가 사람 팔자를 닮는 것인가. 사람 팔자가 땅 팔자를 따르는 것인가. 신토불이란 먹거리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모양으로 골목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과 여러 모로 닮은꼴이다. 탄탄대로 변 초고층 아파트에 사는 이들의 삶은 그 길을 닮아 거칠 것이 없겠지만, 좁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오르막에 둥지를 튼 사람들의 일상은 그 길처럼 구절 양장이다. 쓰레기통과 폐지 묶음과 고장난 자전거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길모퉁이를 더트며 박스 쪼가리나 알루미늄 캔들을 모아 싣고 내려오는 꼬부랑 노인을 만날 때면 살아가는 일의 신산함에 콧 마루가 시큰거리고, 퇴락한 담장 밑에 홀로 붉은 봉숭아가 까닭 없이 서러워 보이기도 한다. 우중충한 현실, 숨기고 싶은 가난, 불확실한 미래를 다 벗어버리고 꿈속에서 나마 메이저를 꿈꾸지만 마이너 리그를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골목이 한 길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라 꿈꾸기에도 그들은 이미 지쳐있는지 모른다.

골목도 사람처럼 병들고 늙는다. 시름 시름 앓아 눕기도 하고 때 없이 몸살을 하기도 한다. 오래된 담 벼락은 검버섯처럼 청태가 끼고 하수구에도 혈전이 생긴다. 칠이 벗겨지고 돌쩌귀가 떨어진 대문들이 바람이 불 적마다 삐거덕거리며 가만 가만 관절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나마 그렇게 천천히 게으르게 늙어갈 수만 있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천박한 개발 논리에 떠밀린 골목들이 어느 날 갑자기 떼 죽음을 당하고,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의 변방에 숨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에움길들 조차 혼탁한 상혼에 물들고 찌들어 본 모습을 잃고 아우성 친다.

골목이 사라진 도시는 음영이 없는 얼굴처럼 각박하고 살 풍경해 보인다. 말초 구석까지 양분을 전하고 산소를 공급해주는 모세혈관이 있어 순환이 되는 육신과 같이, 미세한 골목들이 손 금처럼 퍼져있어 도시 또한 소통의 활기를 얻는다. 풍성한 이야깃거리와 거친 삶의 에너지가 뒤섞이고, 사람 사는 냄새와 사람 사는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오래 늙은 골목들이 문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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