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윤덕 기자의 사람人]’제1회 장애인 US오픈’에서 우승한 자폐인 골퍼 이승민과 어머니 박지애
“당신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릅니다.”
2000년 가을,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 만 세 돌 된 아이를 관찰한 의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어려서, 미국 생활이 처음이라 말이 더디고 행동이 특별한 거라 믿었던 그녀는 “쇠망치로 머리통을 두드려 맞은 느낌”이었다. 정밀진단을 해보겠냐는 물음에 대답할 정신도 없이 아이를 카시트에 앉힌 뒤 자동차를 운전했다.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데 그녀에겐 온 세상이 암흑처럼 어두웠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절망의 시작이었다.
다섯 살 된 아이는 서울 독립문 근처 어린이집에 다녔다. 생일을 맞은 친구의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생일파티를 위해 아이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아이가 사라졌다고 했다. 혼비백산해 달려나가니 아파트 단지 앞에서 아이가 혼자 울고 있었다. 친구 집에 들어가려는데 다른 아이들이 “넌 오지 마. 넌 바보니까 오지 마”라고 했단다. 길을 헤매느라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아이를 안았다. 절망의 터널은 끝이 없어 보였다.
2022년 7월 20일(현지 시각)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파인허스트 리조트에서 열린 제1회 장애인 US오픈에서 자폐 장애인 골퍼 이승민(25)이 물세례를 받으며 우승컵을 들어올렸을 때 박지애(56)씨는 울지 않았다. “울고 말고 할 정신이…. 기뻐도 힘들어도 저에겐 울 여가가 없었어요. 승민이와 산다는 건 매일매일이 전쟁이라 이거 하나 막고 저거 막는데 급급하지, 내 감정에 치일 여유가 없으니까요. 우는 대신 이를 악물고 살았죠. 긴장이 풀릴까 봐(웃음).”
미국골프협회(USGA)가 올해 창설한 장애인 US오픈에서 초대 챔피언이 된 뒤 귀국한 이승민 선수와 어머니 박지애씨를 지난 16일 수원 컨트리클럽(CC)에서 만났다. 우승을 축하한다고 하자 이 선수가 수줍어하며 “가…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우승한 날 숙소에서 짐을 쌀 때 대통령 축전을 받고 놀랐다는 승민씨 모자는, 광복절 경축행사에도 초청받았다. 박씨는 “우승한 뒤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축하 문자도 받으면서 승민이가 요즘 많이 웃는다”고 했다.
우승 후 ‘골프계 우영우’란 별명을 얻은 이승민과 어머니, 그리고 두 사람이 ‘형’이라 부르는 윤슬기(42) 캐디 겸 코치는 US오픈 3라운드 18번홀의 두 번째 샷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세리의 맨발 샷’ 못지않은 스토리가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3라운드 18번홀이 가장 큰 고비였다고 하던데요.
윤슬기(이하 윤): “우승을 다투던 스웨덴 펠리스 노르만 선수와 동타였는데 그 선수는 페어웨이에 공을 잘 떨어뜨린 상태였고, 승민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 그러니까 트러블 상황에 놓여 있었죠. 승민이가 당황하면 같은 말을 반복해요. 공을 칠 생각은 안 하고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고만 있길래 제가 소리를 질렀죠. ‘승민아, 정신 차려!’”
이승민(이하 이): “형(윤슬기 캐디)이 소… 소리를 쳐서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확 깨서 혀… 형이 일러준 대로 (공이 가야 할) 길을 딱 보고 길게, 세게 쳤어요. (그러자 공이) 그린 앞에 다서여섯 발? 파… 파를 칠 수 있게 된 거죠.”
박지애(이하 박): “실수하면 안 되는 상황인데 파로 잘 막아서 연장전으로 간 거죠. 똑바로 치면 나뭇가지를 맞고 지나가는 거라 그것까지 계산해서 조금 더 길게 치라고 슬기형이 주문한 건데 ‘어떡하지’만 연발하고 있었으니 속이 터졌을 거예요(웃음).”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여섯 번 외쳤다고요.
윤: “6번이 아니라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중얼거렸어요. 승민이 같은 자폐인들이 곧잘 딴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일종의 제시어를 준 거죠. ‘할 수 있다’를 되뇌이면 다시 집중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다’로 유명한 박상영 선수 펜싱 영상도 여러 차례 보여줬어요.”
박: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스펙트럼 장애인 우영우가 법률 얘기를 한참 하다가 갑자기 고래 얘기로 넘어가잖아요. 승민이도 골프 치다가 순간 샛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아서 형이 정신을 다시 잡아오는 용도로 만든 거예요. ‘정신을 차리자!’도 있어요. 형이 ‘정신을!’ 하면, 승민이가 ‘차리자!’ 외칩니다(웃음).”
-당황하거나 불안할 때 말고도 샛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나요.
박: “우영우가 고래라면 승민이는 개미예요, 그것도 불개미. 특히 전지훈련 가는 베트남에는 페어웨이에 개미들이 곧잘 집을 짓는데, 그걸 발견하면 공은 쳐다도 안 보고 쭈그려 앉아 개미만 관찰합니다.”
-자폐인들이 집중력이 높다고도 하던데요.
윤: “순간 집중력, 몰입력이 아주 좋아요. 트러블 상황이라도 정확히 떨어져야 하는 위치에 떨어져야 파세이브 할 수 있는 원포인트 자리가 있는데 그걸 딱딱 쳐내는 걸 보면 천재성을 느끼죠.”
-이번 대회 중에 최경주 선수도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던데요.
이: “휴대폰 영상으로, 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박: “상대 선수는 버디도 잘 들어가는데, 승민이는 경기가 뒤로 갈수록 어려워한다는 소식을 듣고 격려 해주신 것 같아요.”
-우승 트로피는 어디 있나요?
이: “지… 집에.”
-승민씨 방에요?
이: “아니, 마루에.”
박: “순은이라 매일매일 잘 닦아서 보관하고 있어요. 순회배 대회라 1년 뒤 돌려줘야 하거든요. 우승한 선수의 이름을 새겨서 1년 동안 보관하다가 다음 해 우승한 선수에게 전달하는 트로피입니다. 승민이가 시합 때 썼던 모자와 드라이버는 미국골프협회 박물관에 기증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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