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아빠하고 나하고

정숙인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06-14 09:21

정숙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가는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지천으로 피어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민들레들이 모두 져 버리고 없다. 그들의 텅 빈 자리가 못내 헛헛하다. 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은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열려 있다. 내 시간의 그림자는 어떠한 무게를 지니고 있을까. 지나는 시간에 소리가 있고 보이는 존재였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춤추던 연분홍 꽃잎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그저 초록의 무성한 잎들만이 한 움큼씩 자라 태양을 향해 반짝거리며 웃고 있다. 뒤꼍에서 모아둔 빈 병 정리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 동요 메들리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동요를 부르면 마음이 편하다. 학교 숙제를 모두 마친 아이로 돌아간다. 골목 어귀에서 친구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열 살로 되돌아간다. 놀다가 배가 고프면 새까매진 손으로 주머니에서 십 원짜리를 꺼내 동네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 먹었다. 앞니 빠진 친구는 먹으면서도 계속 떠들었다. 한 개에 오 원 하는 새끼손가락만 한 떡볶이 두 개를 빨간 고추장 국물을 듬뿍 묻혀 떡은 먹지 않고 국물만 쪽쪽 빨아먹었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국물만 핥아 먹자 아줌마는 눈에 쌍심지가 돋고 급기야는 소리를 빽 질렀다. “야!! 국물만 계속해서 빨아먹으면 어떡하니. 그만 먹고 가!” 밀가루 떡보다도 공짜인 고추장 국물의 달큰함이 주린 배를 채워주던 때였다. 동요를 부르면 어릴 적 추억이 차례로 떠오르고 왠지 모르게 포근해진다. 그때는 형제들과 적은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추운 겨울 아랫목에서 이불 하나를 가지고도 마냥 화목했었다. 초등학교 시절 열심히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배웠던 노래들은 언제 불러도 정겹고 좋았다. 동요는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어 삶에 지친 마음을 위로해준다. 세상사에 찌든 마음이 말갛게 씻기고 잠시나마 순수해지는 것 같아 좋다. 조금 있으면 아버지의 날이다. 대전 현충원에 고이 잠들어 계신 아버지가 무한정 보고 싶다. 아버지는 소일삼아 뒷마당에 밭을 일구어 깻잎과 무, 배추, 열무, 상추와 호박 등을 심으셨다.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청춘을 만끽하던 나는 한 번도 그런 아버지를 도와드린 적이 없었다. 끼니도 밖에서 해결하느라 아버지의 농작물을 맛볼 기회도 적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끼니마다 풍성한 푸성귀들을 앞에 놓고 오롯이 두 분이 식사하셨다. 어쩌다 약속이 취소되어 집에 있는 날이었는데 아버지에게 깻잎 튀김을 만들어 드린 적이 있었다. 넓적한 깻잎을 반죽에 넣어 그 모양 그대로 튀겨 드렸는데 아버지는 내가 만든 튀김을 아주 맛나게 잡수시며 좋아하셨다. 그 아버지의 웃으시던 모습이 가슴에 남아있다. 아버지의 십일 월 생신날에 깻잎을 구할 수가 없어서 고수를 튀김으로 만들어 상에 올렸다. 깻잎 튀김을 해드리고 싶었던 딸의 마음을 아실 것 같았다. 수북하게 접시에 놓인 그것들을 바라보니 잔잔한 슬픔이 몰려왔다. 외국에 살면 불효자라는 말이 맞는다. 십 년 전, 아버지는 내게 등단을 축하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아버지도 젊었을 적에는 수필을 쓰고 시를 쓰셨다고 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캐나다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와 나는 좀 더 서로를 알았을지도 몰랐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보며 살자 그랬죠. 보고 꽃같이 살라 그랬죠빠르게 흘러버린 시간의 뒤안길에 여름 무렵 나는 벌건 얼굴로 튀김을 계속 만들어내고 옆에서 아버지는 목에 수건을 두른 쟁반만 커다란 깻잎 튀김을 잡수시며 행복하게 웃고 계셨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프랙탈 2024.06.07 (금)
“오늘의 헤드라인 뉴스입니다. 어제 오후, 속칭 <버뮤다 연쇄살인>의 여섯 번째 희생자가, 다섯 번째 희생자 이후 불과 7주만에 발견되면서 사회를 다시 충격에 빠뜨린 가운데, 오늘 경찰은…” 고준호 씨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양손으로 뼈채 들고서 발라 먹던 고기를 잠시 내려놓고,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으로 TV 리모컨을 집어올려 홈쇼핑으로 채널을 돌려 버렸다. 고기를 먹으면서 연쇄살인 어쩌구 하는 얘기를 듣기에 고준호 씨의...
곽선영
이민자의 특징 2024.06.07 (금)
  ‘동양의 도학은 약육강식을 부도덕이라고 하지만 서양의 철학은 이기는 자만이 생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을 인용한 것은 과거엔 이민을 운명, 팔자, 역마라 치부했다면 현재는 용기 있고 강한 자의 결단과 도전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민의 방법은 초기엔 간호사나 재봉사 등의 기술이민이 주였다면 지금은 독립이민, 기술이민. 투자이민, 초대 이민 등 다양한 통로가 있다. 초기엔 전문직이 일반적이지 않았는데 이민의...
이명희
나물 캐는 아낙의 시선 피하여길섶 풀숲 속숨어 핀 샛노란 민들레해를 사랑하여환한 꽃 피우고임 온기 느끼며 길가에 서 있다가흰 나비 애무하고 떠나간 뒤날개 단 홀씨 한 다발 들고초원 지나갈 바람 기다린다오! 바람이여저 멀리 하늘 끝에 계신 내 임에게로Please! send seeds beyond the cloudsto the end of the sky
김철훈
강물을 보네깊어지며 흐르는 거역 없는 몸짓을 보네하루를 다 날아온 고단한 태양을 눕히고어느 산기슭 떠나온 나뭇등걸도 함께 눕히고강물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나를 보네팔랑이는 잔물결들 사이로 얼핏 설핏 보네정(精) 때 묻은 부모 형제 다 두고태평양 큰물 건너오던 반세기 전 그날비단결 검은 머리 스물여섯 살 새아씨여!세월을 보네꿈, 좌절, 인내들이 들락거린 한 세월을 보네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째 일어서면서고향 떠나 멀리 또...
안봉자
세 번의 외과수술 2024.06.03 (월)
우리는 지금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이 발달하여 새롭게 나날이 달라지는 세상을 산다고 했더니 어느 날 주위를 살펴보니 100세 이상 사시는 노인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60세 환갑잔치를 요란하게 치르던 때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환갑잔치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100세 잔치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도 아니다. 수명이 늘어난 것은 의료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덕분이다. 이런저런 수술로 죽을 사람이 죽지 않고...
심현섭
감자 꽃 향기 2024.06.03 (월)
“할무니, 왜 이쁜 감자 꽃을 다 따분당께라우?” “꽃을 따내 줘야 밑이 쑥쑥 든다고 안 그러냐?”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을까. 할머니를 따라 밭에 나갔다. 할머니는 밭을 한 바퀴 휘 둘러보시더니 감자 밭으로 가 감자 꽃을 따기 시작했다. 꽃은 꽃이고 밑은 밑일 텐데 어린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니 어미가 감자 꽃을 참 이뻐했느니라.” 하시더니 눈물을 훔치셨다. 엄마가? 순간 흐린 기억으로 어머니가 감자 꽃을 바라보고...
최원현
오 월 찬가 2024.06.03 (월)
상큼한 산들바람 손등 스치고 지나가면나무를 건너뛰던 다람쥐 나도 보아 달라하고 작은 무도회를 연캐나다 구스 공연 햇살도 왜 나는 안 봐주냐며무릎에 앉았다 눈으로 보아도 들리는 님의 소리처럼
전재민
엄마의 빨랫줄 2024.05.27 (월)
그 시절 엄마는아침 설거지 마치고이불 홑청 빨래를 하곤 했다커다란 솥단지에 폭폭 삶아돌판 위에 얹어 놓고탕탕 방망이질을 해댔다고된 시집살이에마음의 얼룩 지워지라고부아난 심정 풀어보려고눈물 대신 그렇게 두드렸을까구정물 맑아진 빨래를마당 이편에서 저편으로말뚝 박은 빨랫줄에 널어놓으면철부지는 그 사이로 신나서 나풀댔다부끄러운 옷까지 대롱대롱 매달린울 엄마 늘어진 빨랫줄은 마음의 쉼터옹이 지고 구겨진 마음이훈풍에...
임현숙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