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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땅에도 서러움 많았습니다”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8-04-16 00:00

문영석 캐나다학교수 첫 번째 강연 ‘캐나다 역사'

15일 한인회관에서 열린 캐나다학 특별공개강연에서 문영석 교수가 캐나다의 역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번 강연은 오는 5월 6일까지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한인회관에서 열린다.

 한카교류재단 회장으로 현재 UBC방문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문영석 교수가 15일 오후 7시 밴쿠버 한인회관에서 ‘캐나다의 역사’를 주제로 첫 번째 강연회를 개최했다. 문 교수는 캐나다의 최초이민자는 누구인가, 미국독립전쟁의 발단이 된 캐나다, 백인 중심 이민정책으로부터의 변화 등 캐나다 역사의 중요한 요점들을 짚어 설명했다. 강연 주요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캐나다 최초 이민자는 아시아계”

1만2000년전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동북부는 연결돼 있었고 캐나다에 최초로 거주한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아시아에서 이주해왔다. 최근 DNA조사 결과 원주민들은 한민족의 옛 조상과 같은 만주나 몽고에서 온 것으로 나타났다. 시베리아에서 이주를 시작한 한 무리에서 갈래가 생겨 일부는 몽고-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일부는 북진해서 베링해협-알류산열도를 통해 북미로 들어왔다.

“콜럼버스는 신대륙 처음 발견한 사람 아니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북미대륙을 처음 발견했다고 배웠지만 북미주에 등장한 최초의 유럽인은 1000년 전 아이슬란드-그린란드를 거쳐 지금의 뉴펀들랜드에 상륙한 바이킹이었다. 사실 콜럼버스 이전에도 유럽의 어부들이 뉴펀들랜드 인근에서 대구를 잡아가곤 했는데, 어부들은 이 풍성한 어장을 보호하기 위해 신대륙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콜럼버스는 어부의 비밀을 깬 것이다.

“유럽에서 온 질병이 원주민 몰살시켜”

원주민들은 교역을 좋아하고 남 돕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온 사람들을 적대하지 않고 이곳에서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필요한 물건을 교환했다. 그러나 이 결과 유럽에서 건너온 홍역, 독감이 원주민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유럽인 도착 당시 적게는 1000만, 많게는 2000만이었던 원주민 인구는 급격하게 줄어 1800년대에는 56만명까지 감소했다. 2006년 현재 원주민 인구는 100만명으로 소폭 회복했다.

“3가지 제도가 원주민을 말살 시켰다”

원주민 보호구역, 원주민 기숙학교와 백인가정 입양이 원주민 문화를 말살시켰다. 보호구역에서는 할 일이 없는 가운데 연금을 받는 원주민들 사이에 술과 흡연, 마약문제가 성행한 상태로 방치됐다. 과거에는 5~15세 사이 원주민을 데려다가 기숙학교에 수용하고 원주민언어로 말할 경우 혀에다 바늘을 세우는 등 학대를 했으며 동시에 부모와 만나지 못하게 해 자식과 부모간의 연대를 깼다. 또한 가출 원주민 청소년 20만명을 백인 가정에 양자로 입양해 사실상 그들의 문화를 접할 기회를 제거했다. 이런 행동들에 대해 1998년 캐나다는 국가수반인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명의로 원주민에게 사과를 발표했다.

“캐나다 처음 건설한 사람은 프랑스인”

캐나다는 1534년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 의해 2차례 탐사됐으며 그는 이로쿼이족의 마을을 뜻하는 말인 ‘카나다(Kanada)’를 세인트 로렌스강 인근의 지명으로 붙였다. 현재 국명은 이 ‘카나다’에서 유래했다. 최초 정착해 식민자를 건설한 사람도 프랑스인 사무엘 드 샴플레인이다. 1608년 7월 3일 6가족28명이 퀘벡주에 도착해 ‘라 뉴벨 프랑스(La Nouvelle France)’ 건설을 시작했다. 이들 28명 중 그 해 겨울을 보내고 생존한 사람은 단 8명. 그러나 원주민과 비버 모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프랑스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원주민의 모피를 성냥이나 양은 냄비를 주고 바꾸어 유럽에 팔았다.

“영국과의 전쟁으로 밀려난 프랑스계”

1700년대 지금의 미국 버지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온 영국이 1759년 퀘벡으로 쳐들어와 퀘벡시티가 함락당한다. 이후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북미주 내 영토를 영국에 내주기 시작했다. 퀘벡 함락 후 프랑스계 지도층은 본국으로 도주했으며 농부였던 6만명만 남았다. 이들과 그 후손은 1960년대까지 ‘화이트 니그로’로 아이리쉬계와 함께 차별을 받아 부두 하역노동자나 농부 등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초기 캐나다에는 프랑스계 인구가 더 많았으나 영국이 앵글로색슨과 스코틀랜드계 이민을 적극 장려해 1800년대에는 영어권 인구가 불어권 인구를 압도했다.

“美 독립전쟁 발발 원인 된 캐나다 점령”

1775년 발발한 미국 독립전쟁의 원인 중 하나는 캐나다다. 영국의 퀘벡 점령은 30평 집을 갑자기 100평으로 늘린 것과 같아 행정을 위해 엄청난 유지비가 필요했다. 이로 인해 미국 동부 지역의 영국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이 부과됐다. 더구나 영국은 퀘벡의 로만 가톨릭 신앙과 불어사용을 인정, 미국 청교도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으며 결국 독립전쟁으로 비화됐다.
독립전쟁에서 영국이 패전하자 미국내 왕당파는 뉴브런스윅즈나 대서양연안주, 온타리오주로 이전했다. 이들이 캐나다 영국계의 조상이다.

“미국의 영토확장과 골드러시로 캐나다 연방 형성”

1800년대 미국의 영토 확장이 계속된 가운데 1860년대 BC주 프레이저 밸리에서 금광이 발견되는 등 골드러시가 일어나자 미국의 침략가능성에 불안을 느낀 캐나다인들은 연방을 결성했다. 1867년 7월 1일 온타리오, 퀘벡, 뉴브런스윅, 노바 스코시아 4개주로 시작한 캐나다 연방은 계속 확대돼 지금의 캐나다를 이루었다. BC주는 1871년 연방에 가입했으며 1914년 캐나다 대륙횡단철도의 종착점으로 밴쿠버가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대륙횡단철도를 위해 중국에서 인력을 도입했으나 완공 후 캐나다는 이들을 쫓아내기 위한 인두세를 도입하는 등의 정책을 펼쳐 괴롭혔다.

“2차 대전은 캐나다 산업화의 계기”

캐나다가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변모하게 된 계기는 2차 대전이었다. 당시 군수생산기지가 캐나다 에 대거 건설됐고, 종전 후 이 시설이 민간 산업시설로 탈바꿈하면서 캐나다는 산업입국의 기회를 맞았다.
또한 산업화는 그간 1순위로 영국계, 2순위로 미국-프랑스계, 3순위로 북동 유럽계를 받던 백인중심 이민정책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됐다. 캐나다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 남부 유럽계-이탈리아계 이민을 개방했고, 이어 1967년 이민 점수제로 전환하면서 마침내 국적과 혈통에 상관없이 이민자를 받기 시작했다.

“태평양 시대로 전환”

1970년대까지 캐나다의 교역은 미국-유럽을 중심으로 한 ‘아틀란틱 트라이앵글’ 체제였다. 그러나 아시아와의 교역량이 점차 증가하면서 1982년 아태지역 교역량이 유럽-대서양 교역량을 앞질러 퍼시픽 트라이앵글 시대로 전환됐다.
한편 이민점수제로 각국에서 이민이 늘어나면서 캐나다 국내에는 절대적인 주류는 없다. 캐나다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국가적 정체성이 아직은 약한 청소년기의 국가다. 현재 세계는 세계화 시대를 통해 다른 문화, 종교, 인종이 공존할 수 있는 모델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캐나다는 이미 이를 실현해 세계시민국가의 견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권민수 기자 ms@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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