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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과 루시 모드 몽고메리

안봉자 시인 lilas1144@yahoo.co.kr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11-20 12:04

안봉자 시인의 <빨강머리 앤> 테마 여행기(8)
관광 제4일. 새벽녘에 바람이 몹시 불었다. 일행의 일부는 선택관광으로 고등어낚시 하러 바다에 나가고, 일부는 낚시 나간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자유시간을 가졌다. 아홉 시경에 낚시 갔던 일행이 돌아왔다. 염려했던 대로 바람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낚시를 못 했단다. 우리는 다 함께 서둘러 아침을 먹고 열 시에 호텔을 나섰다. 이때쯤엔 바람도 자고, 버스는 씻은 배추잎처럼 풋풋한 아침 속을 두어 시간 달려서 캐나다 동쪽 끌 마을 캐번디쉬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그곳은 이미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린게이블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본 공원묘지의 몽고메리 무덤에도 꽤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모두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에본리 마을의 실제 무대이자 작가 L. M. 몽고메리의 고향이기도 한 캐번디쉬에서 그들의 로망 '빨강머리 앤'의 자취를 확인하려고 찾아오는 몽고메리의 독자들이다. 1937년에 캐나다 공원 당국 (Parks Canada)이 PEI 북쪽 아름다운 캐번디쉬 해안 40km 지역을 공원으로 개발하고, 책에 나오는 장소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이곳 빨강머리 앤 테마공원에는 매일 평균 2,000여 명의 발길이 세계 각처에서 몰려온다고 한다.


<▲ 캐번디쉬 공원 묘지 Lucy Maud Montgomery의 무덤: 아침녘인데 꽤 여러 사람이 와 있다. 이곳엔 사철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우리는 곧 비지터즈센터로 안내되었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벽에 걸린 몽고메리의 사진과 진열장 안에 놓인 골동품 타자기 한 대가 제일 먼저 나의 눈길을 끌었다. 몽고메리가 빨강머리 앤을 집필할 때 사용하던 타자기란다. 진열장엔 몽고메리의 초기 저서들, 독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친구들에게 보낸 육필 편지 몇 장, 그리고 그녀가 작사한 '캐번디쉬 찬가' (Hymn of Cavendish)의 악보 등, 몽고메리의 귀중한 유품들이 함께 전시돼 있었다.

     그곳에서 안내용 팜플랫과 지도를 챙겨 들고 나오다 보니 들어갈 때는 인파에 밀려서 미처 못 본 1m 정도 높이의 기념비도 문 옆에 있었다.

     To the enduring fame of Lucy Maud Montgomery. (루시 모드 몽고메리 불후의 명성에 바침.) 1943년에 '캐나다 역사 기념비 당국'이 몽고메리에 헌정한 기념비였다.  


<▲PEI 국립공원  Visitors Centre에 걸린 L.M. 몽고메리 사진: 몽고메리는 주로 PEI를 무대로 하는 20권의 장편소설과 530편의 단편 소설, 500편의 詩, 그리고 30편의 에세이를 남겼다.  >


     비지터즈센터에서 나와 건물을 끼고 마당을 돌아갔다. 아아, 그리고. ㅡ
     Green Gables House!
     하얀 벽에 초록색 지붕과 창틀이 눈 시리게 산뜻하고 아담한 이층집 --
     그동안 책을 통하여 수없이 드나들었던 앤의 초록 지붕 집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정원은 구석구석 여름꽃들이 한창 곱고, 뜰 한옆엔 세월을 업은 나무 한 그루가 수굿하니 서 있다.


<▲빨강머리 Anne의 집 Green Gables House에서: 이층 오른쪽 창문이 앤의 침실이다.  >

 
     Green Gables는 작가 L. M. 몽고메리 외할아버지의 사촌인 맥닐(Macneill) 씨 부부가 살던 집으로 몽고메리가 어릴 적에 자주 놀러 갔던 곳이다. 그녀는 후에 빨강머리 앤을 쓸 때 이 맥닐 씨의 집을 모델로 삼았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린게이블에 들어서면 거실, 부엌, 식당은 물론 침실에 걸리고 놓인 자잘한 소품들 사이에서 실재와 소설의 경계를 잃는다. 몽고메리 자신도 소설의 Green Gables와 맥닐 씨의 Green Gables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건 집뿐만 아니다. 소설의 에본리 마을과 그 외 여러 장소도 이름만 바뀌었을 뿐, 모두 몽고메리 지신의 유년 시절과 깊은 관계가 있다.

     Green Gables는 방마다 1920년대풍 가구들로 묵직했고, 각 침실들에선 책의 세 주인공의 성격과 취향이 진하게 드러났다. 1층 매튜 아저씨 방의 모자와 조끼, 2층 마릴라 아주머니 방의 찬송가 책과 검은 숄(shawl)과 자수정 브로치가 그렇고, 앤의 방 선반에 놓인 책들과 새 둥지와 앤의 옷가지들이 그렇다. 옷장 문에 걸린 소매에 주름장식이 많은 갈색 원피스는  매튜 아저씨가 앤에게 첫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것이다. 세월이 이곳은 비껴갔는가? 잠시 놀러 나간 앤이 금방이라도 폴짝폴짝 뛰어들어올 것 같았다.


<▲빨강머리 앤의 침실:  반쯤 열린 옷장 문에 걸린 갈색 원피스는 매튜 아저씨로부터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난생 처음 누군가 자기를 위해 사 준 옷이라며 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


     하얀 울타리 밖을 나와서 얕으막한 비탈을 내려가니 오리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이 뻗어 가고, 오솔길 입구엔 Haunted Wood (유령의 숲)이라는 간판이 이정표처럼 서 있었다. 앤이 그 풍부한 상상력으로 스스로 지어낸 유령들 때문에 한낮에도 지나가길 무척 꺼리던 숲길이다. 그 숲길을 따라서 계속 가면 L. M. 몽고메리가 누워 있는 캐번디쉬 공원묘지가 나온다. 전나무 향기 싱그러운  '유령의 숲' 오솔길을 천천히 되돌아 나오며 나는 앤 시리즈 갈피 속을 헤집고 있었다.


<▲Haunted Woods입구: 그린게이블 앞쪽 비탈길 아래에  숲속으로 뚫린 길이며, 앤이 '유령의 숲'이라고 무척 무서워 하던 곳. 이 숲길에서 앤은 스스로의 환상에 빠져 수차례 해프닝을 치르기도 한다.  >


Why must people kneel down to pray? If I really want to pray, I'd go into great big fields or into the deep woods and look up into that lovely blue sky. And then, I'd just feel prayers. (왜 사람들은 기도할 때 무릎을 꿇어야 하나요? 내가 만약 정말로 기도하고 싶다면, 나는 넓은 들판이나 깊은 숲으로 가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겠어요. 그리고는 그냥 가슴으로 기도를 느끼겠어요.)       - 제1권 빨강머리 앤 중에서-

The nicest and sweetest days are not those on which anything very splendid or wonderful or exciting happens but just those that bring simple little pleasures, following one another softly, like pearls slipping off a string. (가장 즐겁고 행복한 날들이란, 기막히게 멋지고 신나는 일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단순하고 작은 기쁨들이 하나씩 하나씩 진주 알이 줄에서 빠져나오듯 조용히 찾아오는, 그런 날들이야.)     –제2권, 앤 오브 에본리 중에서-

     캐나다에 이민 오기 전, 한글로 빨강머리 앤을 처음 읽을 때는 무조건 재밌어서 읽었다. 그 후 캐나다에 와 살면서 영문으로 읽을 때는, 어떤 어려움에도 꿈을 잃지 않고, 자연과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며, 세상을 선한 눈으로 보는 앤이 좋아서, 그리고는 아동기에서 6남매의 어머니가 되는 과정에 전개되는 앤의 긍정적 삶의 자세에 공감이 가서, 나는 여덟 권의 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앤 시리즈는 모두 다분히 철학적 의미를 내포한, 시처럼 향기로운 문장들로 가득하다. 문장들을 뚝뚝 끊어서 배열하면 그냥 그대로 한 편의 아름다운 詩로 읽힐 때가 많다. 몽고메리는 빨강머리 앤을 통해서 그녀의 독자들을 나이와 상관없이 순수한 영혼의 세계로 인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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