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缺
마음에 결缺이 났다.
결缺은 항아리의 한쪽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것을 표현하는 형성 문자다. 무거운 항아리를 옮기는데 필요한 손잡이가 없으니 항아리가 제구실을 못 한다는 뜻이 ‘이지러지다, 없어지다, 모자라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결점이나 부족한 것이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나름 바르게 걸어가려고 노력한 시간이 흩어진다. 어느새 결이 난 마음, 한번 이지러진 마음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 세상사의 쓸데없는 번뇌와 망상에 시달려 이지러질 대로 이지러진 마음이 억눌러지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밖으로 튀어나와 나이 든 얼굴을 추하게 만든다.
어쩌다 우리는 풍요롭고 따스한 어머니의 뜰을 떠나왔는지. 어쩌다 낯선 북방의 벌판에 발이 닿은 디아스포라 우리, 서로 닮은 사람끼리 반갑게 만나 엮어가야 할 이야기가 왜 이리도 시리고 시끄러운 것인지. 분명, 닮은 얼굴에 쓰는 말이 같은 우리끼리 써나가는 정겹고 포근한 이야기도 많을 텐데. 옹색한 이방인의 들에 삭막한 바람이 불어와 사람의 마음을 구기고 이지러지게 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결이 나버린 내 마음이 무섭다.
결缺이 난 마음엔 무수한 결結이 자리한다.
결結
결結은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결結은 자신을 스스로 결박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하게 만드는 악이다. 항상 자기 생각이 옳고 자신의 행동만이 최선이라 믿는 사람, 자기 생각대로 타인을 조정하려는 사람은 마음에 맺힌 것이 많은 사람, 마음에 번뇌가 많은 사람이다. 마음에 결結이 많은 사람, 그런 사람 누구라도 마음에 맺힌 번뇌를 풀고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심리학자 에드거 루빈이 고안한 ‘루빈의 꽃병’은 하나의 피사체가 다르게 보이는 흑백의 그림이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꽃병 혹은 두 사람의 옆 얼굴로, 형태가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하나의 정답은 없다. 사람은 아는 대로 보고, 본 대로 보며, 보고 싶은 대로 본다. 누구나 자신의 기억, 경험, 습관을 토대로 그림을 해석하며 자신이 이해한 것을 하나의 진실로 믿을 뿐이다. 또 사람은 누군가 선입견을 불어넣어 주면 그 범주를 벗어나기가 무척 어려워 착시의 틀에 갇힐 수밖에 없다. 사실은, 그림 속 흑과 백 중에 각자의 선택이 무엇이든 흑백 모두를 함께 보아야만 어떤 형태 하나를 볼 수 있다. 흑백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선택되지 못한 나머지가 있기에 꽃병이나 얼굴 중 하나의 형태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가면 그림의 형태는 전경과 배경이 번갈아 지각되면서 다른 형태로 역전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루빈의 그림이 보여주는 착시현상은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각자 바라보는 것이 다르고,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대상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인간사에 순간적으로 전경이나 배경, 어느 한 편으로 기울 수 있지만, 다른 편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차이 나는 현실을 인정하고 상대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동일한 사건과 결과를 두고 저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해하는 것은 아닌지. 언제나 이성의 불을 켜고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 관계에 어려움이 있을 때면 루빈의 그림을 떠올려 보면 좋겠다. 눈앞에 드러나는 타인의 행동만 보고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는 편협한 생각에 갇혀 관계를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한다. 시간을 갖고 타인의 행동과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상황을 함께 보는 여유를 가진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품고 이해하며 오래도록 단단한 관계의 끈을 가져가리라 믿는다.
어느새 나잇살만큼 늘어난 내 마음속 결結이 훤히 보인다. 루빈의 꽃병 하나 마음 한쪽에 놓아두며 자유롭고 싶은 오늘이다.
결
사람은 저마다의 결이 있다.
결은 그 사람의 삶이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삶의 무늬이며 색깔이다. 흔히 말하는 ‘결이 다르다.’ 혹은 ‘결이 다른 사람이다’는 사람을 칭찬하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삶의 기준과 신념이 서로 맞지 않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나와 달라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내포된다. 어디라도 사람이 모이는 뜰은 저마다 결이 다른 사람이 어우러져 있다 보니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못해 일어나는 충돌이 있다. 일이 생길 때마다 비틀거리고 이리저리 쏠려 흐르는 주변을 본다.
누구나 살다 보면 엮이고 싶지 않은 일에 섞여 들 때가 있다. 어떤 일이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하지 않던가. 처신이 애매한 상황이라 물러선 자신을 팽개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 책임감을 느끼고 현실을 피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부딪히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고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도 알며 자신의 어떤 모습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만이 가진 자신의 결로 소소하지만 따뜻하게 하루하루 삶을 가꾸어 나가는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어 자신만의 결을 만들어나가는, 긍정적인 의미로 결이 다른 사람이다.
우리가 그리워하고 꿈꾸어야 할 사람은 진정 결이 다른 사람이다. 진정으로 결이 다른 사람은 만사를 억지로 움켜쥐기보다는 비우고 내려놓으려 노력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는 결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결이 아름다운 사람은 마음에 결缺이 나지 않은 넉넉한 사람, 마음에 결結이 없는 편안한 사람이다.
오늘은 결이 아름다운 사람이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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