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사)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
대자연의 땅에 사는 가난한 유목민들, 그들은 헤어질 때 언제나 같은 인사말을 건넨다.
“길 위에서 다시 만나자.“
'앞으로 어떤 상황에 놓인다 해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서로의 다짐이 실린 말이다.
서리 덮인 황량한 평야와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 벼랑 밑으로 넘실대는 파도---, 고립된 외로움을 안고 목적지를 향하는 유목민들은 그 말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영화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올해 93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 주연상 등 6개 부문과 베니스 국제 영화제, 골든 글로브 영화제 등에서 트로피를 휩쓴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는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Jessica Bruder)가 3년간 노매드들을 밀착 취재하며 쓴 원작을 바탕으로 클로이 자오(Chloe Zhao) 감독이 완성한 이 영화는, 한 곳에 정주할 수 없는 노매드들의 삶을 밀도 있게 담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와 주택 시장 붕괴로 인한 불황은 많은 미국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불러왔다. 트레일러와 밴이 집이고 캠핑이 곧 일상이 된 수많은 길 위의 여행자들은 ‘현대의 유목민(Nomad)’으로 불린다. 한때 사회 규범을 따르며 중산층으로 살던 그들 대부분은, 외부의 충격으로 계절노동을 찾아 이동하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주택 대출금 체납으로 집이 압류되고 투자한 저축과 퇴직 연금을 잃은 사람들, 소액의 사회보장연금과 저 임금으로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사람들, 공장의 폐업과 자동화로 고용과 의료 혜택에서 밀려난 사람들, 사랑하던 남편과 아들을 잃고 상실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내가 ‘소유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던 그들은, 이제 예측 가능하던 미래가 신기루임을 받아들이고 변화에 적응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다.
주인공 펀(Fern, Frances McDormand 분)은 사랑하던 남편과 직장을 잃고 ‘선구자’(vanguard)라고 이름 지은 밴에서 노매드의 삶을 시작한다. 아마존 물류창고, 국립공원 캠프장, 사탕무 농장, 식당 등에서 단기 노동자로 일하는 그녀는,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 고통을 나누며 자신을 치유해 간다. 펀이 길에서 만난 청년에게 들려주는 셰익스피어의 짧은 사랑의 시는,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여름날에 비유하며 그의 영혼을 노을빛으로 물들인다.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아니, 그대는 여름보다 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워라/거친 바람이 오월의 꽃봉오리를 흔들고/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짧기만 하네---/그댄 영원한 운율 속에 시간의 일부가 되리니---”
펀은 이 시를 음미하며 혼자이지만 함께 있는,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남편을 떠올린다.
‘누군가 나의 가장 빛나던 시절을 기억해 준다면,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남을 것이다.’
예순네 살의 린다 메이(Linda May)는 오늘도 지프에 트레일러를 달고 계절노동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최소한의 생활 이상의 무언가를 열망하는 일로서, 우리는 음식이나 거주지만큼 희망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재활용품으로 만드는 태양열 주택 (Earthship)과 자급자족의 농사법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 있다. 공동체의 다양한 소셜 미디어에서 생존 전략을 공유하는 그녀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미래를 계획해 나간다.
영화는 전통적 의미의 집이 없는 노매드(Houseless)들이 아픔을 나누며, 삶을 긍정하는 모습에 따스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자연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며 찾은 자유와 평화, 그리고 노매드 공동체에서 새로운 목표를 위해 연대하는 그들은, 이제 트레일러는 이동성을 갖춘 집이며, 최소한의 공간에 생활을 압축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실제 노매드들의 섬세하고 진솔한 연기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의 피아노곡을 배경으로 그들의 절제된 감정을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냉혹한 현실과 그들 내면의 충만함을 모두 담은 클로이 자오 감독의 균형감각은, 너무도 익숙해진 우리의 정형화 된 삶을 돌아보게 한다.
미 중부(South Dakota, Nebraska)와 서부(Nevada, Arizona)의 광활한 자연은, 삶의 의지를 다지는 길 위의 사람들을 품어 안는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유목민들은 몸과 마음을 열어 다시 모험 길에 나선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섬'이라고 굳게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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