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도시의 오아시스

조정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9-05-06 16:43

조정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노란 꽃술을 내민 감자꽃 한 다발을 남편이 말없이 건넨다. 수확기를 앞두고 감자알을 굵게 만들기 위해 꽃을 따내는 남편 옆에서 나는 잠시 감자꽃을 들여다본다. 희고 보드라운 꽃잎 가운데 샛노란 꽃술을 뾰족이 내민 감자꽃은 너무나 앙증맞다. 키 큰 미루나무 가지에 모여 앉은 찌르레기들이 소리 높여 재잘대기 시작한다. 멀리 눈 덮인 골든 이어 산이 보이고 코퀴틀람 강이 흐르는 콜로니 농장 주변 풍경은 언제나 평화롭다. 200여 종의 철새 도래지인 너른 들판엔 억새들이 푸른 물결을 이루고, 딱따구리, 흰머리 독수리, 푸른 왜가리 등이 공중을 가르며 날고 있다. 대지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봄날, 사람들은  망원경을 목에 걸고 25Km에 이르는 포코 산책로와 이어진 강둑길을 따라 새들을 관찰한다.



 10여 년 전, 은퇴 후 자연을 가까이하는 소박한 삶을 기대하던 남편과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콜로니 농장에서 텃밭 농사를 짓기로 했다. 드넓은 밴쿠버 지역 공원 한쪽에 위치한 22년 역사의 콜로니 텃밭 농장은 7에이커 땅에 250여 명의 회원이 유기 농법으로 텃밭 농사를 짓는 곳이다. 신청 후 2년을 기다려 7.5평의 텃밭을 시작으로 지금 우리는 20여 평의 텃밭을 정성껏 가꾸고 있다. 봄이면 재배 작물과 그 위치를 결정한 후, 집 주변 화원과 도서관을 찾아 씨앗과 모종을 구입하고 작물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4월 중순쯤 땅을 깊게 파 엎어 발효된 거름을 섞고 흙을 잘게 부수는 일은 언제나 강도 높은 노동이다. 작물에 따라 발아하기에 알맞은 시기에 씨를 뿌리며, ‘계획한 대로 씨앗이 싹 트지 않는다 해도, 다시 씨를 뿌리고 정성껏 물을 줄 일이다.’라고 다짐한다. 파종 후 씨앗이 새 떡잎을 내밀고 모종이 뿌리를 내리기 까지 ‘농사는 기다림’이라는 느긋함도 배운다. 모종 이식 후, 물 주기, 토마토와 고추 곁 순 따주기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잡초를 뽑을 때는“자연 속에서의 노동은 진정한 삶에 다가가는 일이다.”라는 데이빗 소로의 사유에 깊이 공감하는 시기이다. 

 새소리를 들으며 다른 이들의 텃밭을 돌아보는 일은 즐거운 학습 체험이다. 특별한 흙(sea soil)과 유기농 퇴비를 섞어 흙 만드는 방법을 밭 주인들로 부터 배우고, 모종과 씨앗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 많은 농작물을 수확한 회원들이 노숙자 급식소에 기부하는 프로그램과 공동으로 이용하는 농기구를 확인하며, 다른 이들의 온실 설계와 포도나무 지지대도 꼼꼼히 살펴본다. 회원 중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이민자들은 캐나다 사람들과 더불어 생태 환경을 보호하고자 유기 농법 규정을 잘 지키며, 농장 협회의 공고에 따라 재등록과 공동 구역 정비 작업 그리고 팟럭 파티 연례행사에 기꺼이 참여한다. 파티에 참여한 소수의 한국인 회원들은 김치, 깻잎 전, 쑥떡, 샐먼구이 등으로 솜씨를 뽐내며 다른 회원들과 수확의 기쁨을 함께한다. 



 나는 이곳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상호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의 삶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 나누는 일이라는 긍정의 에너지도 얻는다. 땅에 씨를 뿌리고 땀 흘려 작물을 키우는 일은 도시 생활의 소비 굴레에서 벗어나, 먹을거리를 스스로 생산한다는 보람도 있다. 도시의 반 생태적인 소비의 주체에서 생산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은 도시의 오아시스가 아닐까! 흙냄새를 맡으며 자연과 교감하고 평온한 마음을 갖는 일 또한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 순간이다. 진정한 휴식을 얻을 수 있는 이곳은 이제 보석 같은 존재로 내게 다가와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

 보금자리를 찾는 멧새 떼가 줄지어 날고 들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온다. 오이 넝쿨을 받침대에 묶어주고 물을 듬뿍 준 후 주변을 정리한다. 흙 속에서 땀 흘린 뒤 모든 긴장과 불안이 이완된 이 순간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고향 집 텃밭에 서 있는 나, 본래의 나를 찾는 무념무상의 순간이다. 해 질 무렵, 노을빛 솜털 구름과 환하게 피어난 감자꽃들이 가만히 내게 말을 건넨다.



"지금 이곳에 있음에 행복하라, 기쁜 마음은 겨울도 두렵지 않으니!"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빨리빨리, 천천히 2023.11.27 (월)
   자동판매기 버튼을 눌렀다. 캔 음료가 나오기 전 습관적으로 머리를 숙여 음료수가 나오는 통로로 손을 내밀었다. 조금 기다리니 덜컹하며 내 손에 잡힌 음료가 갈증을 풀어주었다. 자동판매기 앞에서 난 매번 필요 없는 동작을 한다. 커피 자동판매기에서도 버튼을 누른 후 커피가 다 채워지기 전에 손을 먼저 넣어 뜨거운 커피가 손 등에 흘러 데인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습관은 공공기관 서비스 안내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안내 내용을...
정효봉
엄마의 힘 2023.11.27 (월)
   하루에도 몇 번을 오가는 거리가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의 모습 속에서, 외국어로 채워진 상가 외벽의 간판을 보며 나는 누구이고, 내가 있는 곳은 어디 인지를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자메뷰(Jamais Vu), 즉 미시감(未視感) 현상을 말하는 걸까? 익숙한 장소가 낯설게 느껴지면 재빨리 눈을 감거나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이국의 정취에 스며들지 못하는 나는 공기 중에...
권은경
오로라 마주하기 2023.11.27 (월)
서막이 열리기 전 객석은 이미 만석반전 매력이 없는 공연은 싫다면서무대의 천정 끝에서 *스윙이 나타났다*오프닝 코러스로 별 똥이 지나간 뒤객석은 발아 되어 변주로 출렁이며수많은 빗살 무늬로 줄을 타는 아리아극한의 무대 위에 광량은 클라이 막스2막 3장 푸른 빛을 되감는 필름처럼오, 그대 다시 보고파 불러본다 *커튼 콜*스윙(Swing)-모든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배역으로 주 배우의 이동 시 역할을 맡는 배우*오프닝 코러스(Opening Chorus)-서곡이...
이상목
가을날 2023.11.20 (월)
하늘빛 깊어져가로수 이파리 물들어가면심연에 묻힌 것들이명치끝에서 치오른다단풍빛 눈빛이며뒤돌아 선 가랑잎 사람말씨 곱던 그녀랑두레박으로 퍼올리고 싶다다시 만난다면봄날처럼 웃을 수 있을까가을은 촉수를 흔들며 사냥감을 찾고나무 빛깔에 스며들며덜컥 가을의 포로가 되고 만다냄비에선 김치찌개가 보글거리고달님도 창문 안을 기웃거리는데.
임현숙
    케이팝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한 유명인이 성경 강의를 한다고 해서, 유튜브를 통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강의 시작에 앞서 그 유명인은 자기의 사적인 이야기부터 꺼냈다. 얼마 전 생일날 친구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너에게.”로 시작되는 생일 카드를 받았다고 했다. 그 카드를 준 친구와는 무명 시절을 같이 보냈었는데, 현재 자기는 크게 성공했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무명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친구 눈에는 그가 얼마나...
박정은
어떤 눈물 2023.11.20 (월)
   벌써 14년 전이다. 한 방송사가 47주년 특별 기획이라며 보여주던 다큐멘터리는 참 충격적이었다. 우연히 채널을 돌렸다가 보게 된 프로였는데 지금도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지구 온난화로 사냥터를 잃어가는 북극곰의 눈물, 빨리 녹아 사라져버리는 작은 유빙流氷에 갇힌 바다 코끼리, 사라지는 툰드라에서 이동하는 순록 떼의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영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는...
최원현
추수감사절 2023.11.20 (월)
바람에 출렁이는 이삭이하늘 문에 닿아 노크를 하네이제는 두 손 모아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시간공중에 나는 새도 가만히 내려와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쪼네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재단에잔치를 베푸시는 농부의 손은거룩하기만 하고허수아비도 참새도 즐겁게 춤을 추면서풍년을 노래하는 추수감사절부귀영화도 한낱 바람과 같다고 하나오늘 만은 들꽃처럼 환하게 노래 하려네
유우영
금은달 금은별 2023.11.15 (수)
하아. 은별이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 온 집은 말이 좋아서 현대식 한옥이지, 낡은 한옥에 부엌과 화장실만 신식으로 덧지은, 그냥 시골집이었다. 이사를 가지 않으면 밥도 안 먹고 학교도 다니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리긴 했지만, 이런 깡촌으로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방문 너머로 아빠와 통화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럼, 잘 도착했지. 이삿짐 아저씨들이 다 제자리에 들여놔줘서 정리만...
곽선영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