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은 1982년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펴내 일본 사회의 심층을 분석하면서 일본의 하이쿠와 분재, 쥘 부채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축소 지향’이 트랜지스터를 비롯한 소형 상품 생산의 성공 요인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일본이 축소 지향을 유지해 공업사회의 거인이 됐지만, 대륙 침략을 통한 확대 지향을 시도했던 것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령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을 총괄 기획했다. 개회식 마무리를 침묵 속에 홀로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의 등장으로 꾸미면서 정적과 여백의 미학을 전 세계에 제시했다.

이어령은 1990년 문화부 장관에 취임한 뒤 국립국어원을 세워 언어 순화의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장관으로서 가장 잘 한 일은 ‘노견(路肩)’이란 행정 용어를 ‘갓길’로 바꾼 것”이라고 자평하길 좋아했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세워 문화 영재 양성의 기반도 닦았다. 90년대 초부터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일찍 파악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표어를 제시했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장점을 융합한 ‘디지로그’란 신조어를 내놓으면서 현실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거듭나기’의 비결에 대해 ‘호기심이야말로 창조의 근원’이라고 강조했다.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가는 삶이었다. 미지(未知)에 대한 목마름으로 도전했다. 우물을 파고 마시는 순간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났다.”

그는 서울대 재학 중 만난 강인숙 건국대 명예 교수 사이에 2남 1녀를 뒀다. 강 교수는 “집에 오면 늘 글을 썼고, 몇 년에 한 번은 1년씩 외국에 나가 책 한 권을 써냈다”고 회상했다. 그는 2012년 맏딸 이민아 목사를 암으로 잃었지만, 딸의 권유로 기독교에 귀의했다. “지성의 종착역은 영성(靈性)”이라고 했다. “하나님도 인간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면 가엾게 여겨서 잠시 그 자비로운 손으로 만져줄 때가 있다. 배 아플 때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만져주면 반짝 낫는 것 같지 않나. 그때 나는 신께 기도한다.”

그는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에 대해 “모든 게 선물이었다”고 했다.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

고인은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른다.